칸 나오토 총리가 일본의 한국 강제 합병으로 100 년이되는 것을 계기로, 10 일 발표한 총리 담화에 대해 부족하다는 반응이 각 방면에서 보인 가운데, 한국과 일본의 국회 의원이 일본에서 전후 보상 하라는 기자 회견을 갖기로했습니다.
올해 5 월 "한일 과거사 청산과 미래를위한 평화 의원 연대"를 출범 양국의 과거사를 청산하기위한 공동 성명 발표를 추진해온 한국과 일본의 국회 의원 19 일 일본에서 전후 보상 문제 등에 관한 간담회를 연 뒤 기자 회견을 갖고 일본 정부에 대한 전후 보상하라는 공동 성명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중의원 의원 회관에서 열린이 간담회에는 한국에서 한나라당의 황우여의원과 구상찬 의원, 야당 민주당의 유선호의원, 강창일 의원, 자유선진당 박선영의원 등이 참석, 일본에서 민주당 사이토 쯔요시 의원 등 10 여명이 참석할 예정입니다.
양국 의원은 간담회에서 일본의 한국 강제 합병의 불법성, 전후 보상과 종군 위안부 문제, 재일 한국인의 지방 참정권 문제 등에 대해 논의 후 공동 기자 회견을 갖고,이 현안에 대한 입장 을 밝힐 예정입니다.
한일 양국의 의원이 공동으로 전후 보상하라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한일병합이 국제법상 무효임을 보여주는 일본 국왕의 조서 원본 등 역사적 문건이 확인됐다고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가 밝혔습니다.
이태진 교수는 1910년 8월 29일 일본 국왕이 한일병합을 재가하고 공포하기 위해 작성한 조서를 보면 국새와 함께 국왕의 이름이 서명돼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에 반해 대한제국 순종황제가 같은 날 반포한 문건을 보면 국새도 없고 이름 서명도 없다면서 일본 국왕의 문서 형식과 확연하게 다르다고 이 교수는 지적했습니다.
이 교수는 이처럼 한일병합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조서 또는 칙유 문서 형식이 다른 것은 한일병합이 순종황제 승인을 거쳐 이뤄졌다는 일본측 주장을 뒤엎는 자료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 ‘한일병합 무효’ 입증 문서 첫 공개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일본 도쿄(東京) 국립공문서관에서 입수해 11일 공개한 ‘일본측 한일병합 조서’의 원본사진(오른쪽)과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한국측 조서(칙유) 사진. 1910년 8월29일 일본 메이지(明治) 천황이 한일병합을 공포한 조서에는 국새(천황어새·天皇御璽)를 찍고 ‘무쓰히토(睦仁·메이지 천황의 본명)’라는 한자 이름이 서명돼 있는 반면, 같은 날 대한제국 순종황제가 반포한 조서 원본에는 국새 대신 ‘칙명지보(勅命之寶)’라는 어새가 날인돼 있고 ‘이척(李拓)’이란 이름도 서명되지 않았다. 이 교수는 “‘일본측 한일병합 조서’의 원본사진이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한일병합 조약이 국제법상으로 무효임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밝혔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제공
이번 자료는 대한제국이 작성해야할 문서까지 일제의 통감부가 주도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병합조약이 무효라는 주장에 더욱 힘이 실리게 됐습니다.
김정아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꼭 100년 전인 1910년 8월 22일 작성된 한일합병 조약서입니다.
대한제국과 일본이 각각 작성한 2개의 조약서를 보면, 한글과 일본 글씨를 제외한 한문으로 된 글씨체가 모두 똑같습니다.
이완용에게 병합조약의 전권을 위임하는 위임장과, 병합조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양국 황제가 동시에 발표하자는 '각서'도 마찬가집니다.
같은 날 작성된 이 4개의 문서 모두 글씨체를 보면 한 사람이 작성했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특히 '각서' 문서 가운데에는 통감부라는 세 글자가 선명해 모든 문서가 통감부 주도로 이뤄졌음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인터뷰:윤대원, 서울대학교 규장각 HK연구교수] "특히 3번째 각서에 통감부란 판심이 있는 것,이것으로 통감부 측에서 한 사람이 4가지 문서를 동시에 썼다는 것을 확인할수 있죠."
또 병합조약 체결 당시까지 2년 여 동안 작성된 '각의 제출안 목록'에는 병합조약과 관련된 안건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
이완용에게 전권을 위임한다는 '승인 조회비 408호' 등이 조약 체결 당일 날 급한 문서의 경우에만 사용하는 '지급'으로 다뤄진 점도 조약체결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이뤄졌음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인터뷰:윤대원, 서울대 규장각 HK 교수] "승인절차를 밟도록 요구한 문서들이 병합조약과 관련해서는 전부다 '지급'이라는 특이한 형태로 다른 문서와 달리 진행되고 있고 그것도 조약이 이뤄지는 바로 당일 몇시간 전에 문서가 이뤄졌다는 것이죠."
서울대 규장각은 대한제국의 국권침탈 과정 뿐 아니라 대한제국의 영토 정책에 대한 중요 유물들도 공개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와 중국이 각각 영토를 주장한 백두산 정계비 지도에서는 대한제국의 영토 수호에 대한 의지를 살펴볼 수 있고,간도주민에게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1900년대 초 간도 지역 주민들이 경작한 농경지 규모를 조사한 책 등은 당시 대한제국이 간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말 진실이 담겨 있을까요 ? 그 총리의 말속에는 말장난으로 우리를 폄하하려는 속셈까지 보이는데 무슨 진실담긴 담화라고 평가 ? 한글이 딸리나요? 아님 이해력이 부족한가요 ? 아님 해석을 못하는 건가요 ?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가 10일 발표한 한국강제병합 100년 담화에 대해 한국측의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를 계기로 양국이 정치 분야에서도 좋은 형태로 발전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표명했다.
누가 긍정적인 평가를 했는데 ? 이명박 대통령만이 긍정적이겠지 ? 우리 대 다수의 대한국민들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고요
간 총리는 10일 오후 3시께 일본 총리관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병합 100년이라는 전환점을 맞아 이제까지 100년을 돌아보면서 반성할 점은 반성하고, 이제부터 100년의 길을 함께 걸어간다는 마음으로 담화를 발표했다”며 “오늘 이명박 대통령과 전화회담에서도 ’진심이 담긴 담화’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밝혔다.
핵심은 비켜가고 ... 옛날 한 얘기 반복 정도의 수준이라면 입을 닥치고 있어야지 ? 이게 간 총리의 진정한 담화인가 ? 에 대해서는 역시 섬나라 왜? 는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해 ... 라고 판단하는 우리 대한민국의 보통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할 거냐고 ? 내가 생각하기는 역시 껍질담화 수준으로 비하 한다.
간 총리는 또 “문화 교류를 중심으로 한 일한(한일) 교류가 양국에 플러스(도움)가 된다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정치 분야에서도 이번 담화를 계기로 좋은 형태로 발전을 이뤄내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진정한 반성과 사과도 없이 앞으로의 100년을 어떻게 보장한다고 생각하나 ? 그의 말 속에는 이미 전 후 보상은 끝났으니 ... 지들이 알아서 하라 ! ... 라고 하고 ... 원 주인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반환이지 ? 어찌 인도이냐 ? 우리나라의 명칭이 인도차이나 인가 ? 인도 ? ... 말도 안되는 표현으로 우리 한국민을 우롱하지 말고 ... 조용히 입닷 !!!!
▲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가 10일 오전 총리 집무실에서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내각회의를 마치고 한일한국에 대해 "식민지 지배가 가져온 다대한 손해와 고통에 대해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한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대한이 아니고 막대한이 맞다 ... 언어도 지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미개인 ... 일본의 쪽x리, 왜? 그리고, 그 시절 열강 속에서 지 목숨과 나라의 목숨을 지대로 지키지 못한 ... 이 들에게 우리들은 할 말을 잊었다. ㅠㅠㅠ
앞으로의 한일관계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자유, 시장경제 등 같은 가치관을 갖고 있는 인접국끼리 협력함으로써 세계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세계의 큰 격동기라고 할 수 있는 정세에서 일.미.한(한.미.일) 3국이 동아시아 지역의 안정을 구축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중요성을 강조했다.
일본 니나 그렇게 해라 ! 우린 독자적으로다가 지역의 안정을 구축할 수 있게 ... 자주국방 확실히 그 매김을 할테니까.... 영원한 우방도 없고 영원한 원수도 없다... 그러나 ? 적어도 일본은 믿지 못하겠다... 알간 ?
하지만 담화에서 논란이 된 부분에 대해서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문제가 해결됐다’는 일본 외무성의 입장을 되풀이하는데 그쳤다.
일한 ? 한일 기본 조약은 한일관계 해결의 열쇠가 된게 아니라 ... 더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왜? 냐고 국가 대 국가의 배상도 끝이 아니거니와... 흔히 너희들이 말하는 개인과 개인 ... 국가와 개인 ... 일본과 제2차 세계대전과 그 군국주의에 피 흘린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들... 한 둘이 아니고 약 200만명에 해당하는 그 개인의 보상 ? 배상은 어쩔껀데... 미련 한 것 들.... 그러니 일본 원숭이라는 소리들 듣지 ? 언어가 각기 달라 ... 대화가 안되니까 ?
한 한국인 기자가 “’병합조약은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한일 지식인 성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일한병합조약에 대한 생각은 1965년 일한기본조약에서 확인됐다”고 피해갔고, 문화재 ’반환’이 아니라 ’인도’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도 “법률적인 문제는 이미 해결됐다는 관점에서 인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입장을 되풀이했다.
머가 확인 돼 ? 피해 가면 된다고 생각하니 ? 법률적인 문제는 해결되었다... 너거 일본법... 왜법에 의해 해결되었다고 하는거겠지 ? 국제법 상으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는 넌 영원한 왜? 일 수 밖에
다만 ’인도 대상 문화재가 조선왕실의궤 뿐이냐’는 질문에는 “궁내청에 보관된 여러 가지 조선왕조 시대의 도서를 인도할 생각”이라고 답변, 돌려주는 문화재가 확대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약탈에 의해 너거 섬나라에 여러가지 문화재 강탈해 가지고 갔고... 그 강, 약탈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 반환이 아닌 ? 인도 ? 라고 했나?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
이 밖에 간 총리는 8월15일 야스쿠니신사 참배 의향을 묻는 일본 기자의 질문에 “’총리로 있는 동안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지는 않겠다’고 이미 말한 바 있다”며 “전후 65년간 이 문제에 대한 오랜 논의가 있었지만 이 자리에서 되풀이하지는 않겠다”고 일축했다.
그건 지나 봐야 알고 ... 한 두번 속았나 ?
[日총리 사죄담화] 청구권 걸린 강제징용·위안부 문제 한마디도 없었다 담화내용·양국관계 전망
간 나오토 총리가 우여곡절 끝에 10일 각료회의를 거쳐 한·일 강제병합 100년 담화를 발표했다. 이번 발표는 문화재 반환 의사를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밝혔고, 1910년에 맺어진 한·일합병조약이 강제적으로 맺어졌다는 표현이 우회적으로 포함됐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및 강제징용자에 대한 보상 문제 등은 일절 언급하지 않아 새로운 한·일 100년을 열기에는 크게 미흡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문화재 인도 는 문화재 반환으로 고쳐야... 한다
간 총리는 이날 “일본이 통치하던 기간에 조선총독부를 거쳐 반출돼 일본 정부가 보관하는 조선왕실의궤 등 한반도에서 유래한 귀중한 도서에 대해, 한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여 가까운 시일에 이를 건네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 간 나오토 일본 총리가 10일 오전 도쿄 총리 집무실에서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과거사를 반성하는 담화문을 발표하며 고개 숙여 사죄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말 장난으로 보이는 내 눈은 왜? 일까 ? 왜? 기 때문에
간 총리의 문화재 인도 방침은 일본 소재 한국 문화재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만만치 않다. 물론 간 총리는 문화재 ‘반환’이라는 표현이 아닌 ‘건네다(渡).’라는 용어를 썼다. 즉 인도하겠다는 의미다. 반환은 일본의 문화재 약탈 역사와 함께 법적 문제를 따질 수밖에 없는 탓에 가능한 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도록 하는 차원에서 교묘하게 ‘건네다.’를 꺼내든 셈이다. 다만 조선왕실의궤의 반환을 요구하는 한국 정부와 국민의 입장을 배려한 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즉 간 총리가 밝힌 조선왕실의궤를 비롯한 한반도 유래 도서 인도 방침은 일본에 산재한 무수한 우리 문화재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 한·일병합조약의 불법성
간 총리는 과거사와 관련해 “3·1 독립운동 등의 격렬한 저항에서도 나타났듯이 당시 한국인들의 뜻에 반하여 이루어진 식민지 지배”라고 표현했다. 한·일 지식인들이 줄기차게 요구한 ‘한·일 강제병합은 원천무효’라는 표현은 담지 않았다. 식민지 지배 자체의 강제성을 인정했을 뿐 병합과정의 강제성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병합 과정과 자체의 불법성과 강제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의 한국 병합은 여전히 합법적인 조치로 남게 되는 셈이다.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라는 대목은 지난 1995년 ‘무라야마 담화’와 일맥상통한다.
한일강제병합은 원천무효라는 표현은 왜? 쪽 팔려서 쓰지를 못하나? 쪽바리니까 ? 당연하겠지 ?
사할린 잔류 한국인에 대한 지원과 강제 징용자 유골 반환 등의 협력을 다짐한 대목도 진일보했다는 평가가 있으나, 사실상 이미 양국이 꾸준히 진행해 온 일이라는 점에서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 셈이다.
전후 배상 다 끝났다고 ? 놀고 있네 ... 아직도 우리의 영혼이 사할린의 어디에서 남지나해의 어디에서 일본 히로시마 나카사키 어디에서 헤매고 있는데.... 배상은 커녕 보상도 한푼 없는 일본 왜? 가 전후 자유스러울 것이다... 라는 보장은 이미 없어 ... 알간?
간 총리의 담화가 과거사와 관련해 한계를 드러낸 것은 민주당 내 보수우익 성향의 의원들과 야권, 보수언론 등의 공세로 일본 정부가 움츠러들었기 때문이다.
남의 똥은 구려 보이고 지똥은 맛있게 보여서... 그럼 영원히 니 똥만 먹고 살아라 !!!!
센고쿠 장관은 지난달 8일 기자회견에서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정부 청구권과 함께 소멸했는지 논란이 인 개인청구권에 대해 “(개인청구권도 함께 소멸했다는 해석이) 법률적으로 정당성이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좋은가, 모두 해결된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다.”고 지금까지의 일본 정부 견해와는 다른 의견을 밝혀 이번 담화에 뭔가 ‘큰 내용’이 담기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무라야마 담화 수준을 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조선왕실의궤, 왕실 기록문화의 꽃…88년만에 고국으로 조선 마지막 國葬 `명성황후 의궤` 최고 관심
◆ 日총리 과거사 사죄 ◆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반환 발표로 `조선왕실의궤` 81종이 8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의궤`는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이자 강력한 왕권을 견제했던 수단이어서 조선 왕실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 의궤 반환 의미
일본이 반환하겠다고 약속한 궁내청 소장 의궤는 강원도 평창 오대산 사고에 보관돼 있다가 한ㆍ일 강제병합 후인 1922년 조선총독부가 반출한 81종 167책이다. 총독부는 이를 일본 왕실에 기증해 88년 동안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 소장돼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일본 정부가 일제 강점기에 반출한 조선 왕실 유물을 반환하겠다고 밝힌 것은 1966년 문화재협정 반환 이후 처음"이라고 말했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는 "대한제국의 잃어버린 역사의 한 퍼즐 조각을 의궤 반환을 통해 맞출 수 있을 것"이라며 "조선 후기 역사의 현장과 왕실문화 가치나 의미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성화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국내 규장각과 장서각에 소장된 조선왕실의궤는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 어떤 문화재가 반환되나
의궤뿐만 아니라 궁내청에 소장된 다른 `한반도 귀중한 도서`도 반환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간 총리의 담화대로라면 총독부를 통해 일본에 불법 반출된 유물, 즉 궁내청뿐만 아니라 일본 입법부와 사법부에 소장된 다른 유물도 얼마든지 환수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전문가 실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조율할 것"이라며 "생각보다 환수 도서 대상이 많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궁내청은 의궤 말고도 제실도서와 강연 서적 등 조선 왕실 일반 도서를 대거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2세기 고려 왕실 도서도 포함돼 있다.
의궤 가운데 가장 관심이 높은 것은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다. 동일본(同一本)이 규장각에 소장돼 있지만 이 의궤를 통해 명성황후 장례식 장면을 그림과 글로 생생하게 짚어볼 수 있다. 명성황후 국장은 조선 왕실의 마지막 국장이라는 데 의미가 크다.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의궤는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조선 기록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며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의궤 191종 297책 반환도 조속히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언제 돌려받나
의궤를 포함한 `한반도 유래 문서`를 돌려받는 시점은 이명박 대통령의 방일이 예상되는 11~12월께가 될 전망이다. 정부 당국자는 "우리 쪽에선 외교통상부와 문화재청이 나서 반환 대상을 정하는 협의를 진행할 것"이라며 "협의가 이뤄지면 조선의궤 등이 일본 정부 소유기 때문에 반환 문화재 협정을 맺게 되고, 반환 대상 문화재는 협정 부속서에 담길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의궤뿐만 아니라 일본에 반출된 문화재를 반환받기 위해 일본 내 한국 문화재 상세 조사에 나설 방침이다.
■ <용어>
조선왕실의궤 =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 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남긴 보고서 형식의 책이다. 의궤는 의식(儀式)과 궤범(軌範)을 합한 말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 조선 왕실 `기록문화의 꽃`으로 후대에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려는 목적에서 편찬됐다.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가 10일 발표한 담화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의 심정을 '오와비(お¤び)'로 표현한 것은 법적인 책임을 피하기 위한 용어 선택으로 보인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오와비'는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라는 뜻으로 한국어로 번역할 때 사죄 또는 사과의 뜻으로 풀이되지만 그 이상의 법적인 책임과는 관련이 없는 용어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외교 소식통은 11일 "일본에서 '샤자이(謝罪) 라고 사죄의 뜻을 나타내면 이는 법적인 책임까지 지는 것을 뜻한다"며 "아마도 이번 담화가 추가적인 법적 책임으로 문제가 확대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샤자이 대신 오와비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간 총리가 '샤자이'라는 용어를 피한 이유는 과거사 뿐 한국 문화재 반환이라는 법적 책임이 확대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게 외교소식통의 설명이다.
특히 법적 문제로 확대되기 시작하면 양국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이라는 기반을 바꿔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일관계의 전반적인 틀을 새로 짜야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결국 이 같은 파장 확대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오와비'라는 표현을 다시 활용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오와비는 1998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한일공동파트너십을 발표할 당시 일본 정부가 사용했던 표현이기도 하다. 또 일본 정부가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사죄의 뜻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활용해왔다. 간 총리의 담화가 과거보다 진전이 있다고는 하지만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런 사죄 표현 방식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나라가 망한 지 100년 되는 올해를 잊을 수 없게 하는 책 하나가 있다. 오래전에 한번 스쳤지만, 그 상식에 도전하고 있는 만만찮은 책 이름 때문에 기억의 한 구석에 늘 남아 있었다. <일본이 미국을 추월하고도 한국에 지게 되는 이유>(金禧鎭 역, 한국경제신문사)가 그 책이다.
대만계 일본인인 샤세키(謝世輝) 교수(東海大學)가 1985년에 썼다. 이번에 펼쳐 보았더니, “2010년에 한국이 일본을 앞지른다”고 써 놓았다. 샤(謝) 교수가 점을 친 것은 아니고,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출발했던 일본의 출발1980년대 들어 어떻게 미국의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를 슬럼화시켰던가를 들어가며, 시간 폭을 두고 각국 산업에 드러난 소장 추세와, 그를 추동하는 각 나라 경제인구의 열정과 바이탈리티(vitality)의 변동상으로 미래를 예측해 보인 것이다. 샤 교수는 30여 년 전에 2010년을 예측했던 것이다.
좋은 숫자도 더러 있지만, 저출산율이 일본을 따라잡아 OECD 국가 중 최하위가 되었고 자살률도 일본을 바짝 뒤쫓고 있는 현실이다. 일본 쫓다가 생긴 현상이다. 눈길을 안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克日 달성 예언의 해, 2010
갈 길은 아직 멀어 보인다. 그런데 확실히 달라진 것이 있다. 1980년대 중반에,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는 날이 2010년에 올 것이라 했을 때는 좀 허황되게 들렸는데, 2010년 오늘은 가슴 벅찬 현실감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주목하는 것은, 한국이 일본을 추월할 것이라고 샤 교수가 들고 있는 이유들이다. 그는 출신배경 때문인지, 한국·일본 문제에 머뭇거림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국민성을 털어놓고 있다.
샤 교수는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는 동력원을, 한국인들의 일본을 향한 역사적 정서에서 찾고 있다.
“일본 청소년의 정신적인 장애와는 반대로 지금의 한국사람(중년이나 청소년이나)은 의욕적이고 ‘극일(克日)’에 불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극일’이라는 것은 일본을 뒤쫓고 앞지르자는 것이다. 다수의 한국 사람은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억압에 대한 보복과, 특히 제2차대전 후 일본사람의 한국에 대한 무이해를 분하게 여겨 일본을 앞지르려고 전 국민이 불타고 있는 것이다.”(위에 든 책 pp.188~189)
‘극일’이라는 말은 1980년대 초가 되어서야 한국의 매스컴 일부에서 쓰기 시작한 말인데 일본의 샤 교수가 1985년에 벌써 눈이 간 것은 놀라운 일이다. 1980년대 그때에 샤 교수는 부자나라 일본이 이타적(利他的)으로 돈 쓸 줄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지금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없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 일본을 앞지를 요인
“일본사람은 세계의 부(富)를 끌어 모으지만 세계에 서비스를 하지 않는 놀라운 ‘이코노믹 애니멀’이 되고 있다. 가령 1985년의 일본은 500억 달러 이상의 무역흑자를 기록하고 있지만, 그해에 일본사람들은 미국에 증권 등 60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 일본은 당시 유일한 흑자대국이면서 세계에서 긁어모은 돈을 거의 미국의 금리를 벌기 위해 투자하고 있던 것이다.”
샤(謝) 교수는 일본을 향해 예언적 경고를 덧붙이고 있다.
“세계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중에 유일한 부자나라가 한층 돈을 긁어모으고 있는 천박스런 욕심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으로 생각하는가?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진리(과학법칙)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도덕률 등)도 엄존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위에든 책 p.190)
한일경쟁에서 한국이 일본을 앞지를 요인으로 샤 교수가 들고 있는 것은, 독창성, 상대방 언어의 이해력, 강인성, 정보화 사회 후발의 이점 4가지이다.
영웅적 문화 창조운동, 분출구 앞에 서다
이 글은 주로 한국인의 강점으로 든 4가지 중에서, 샤 교수가 ‘강인성’을 한국인의 고난의 역사체험과 관련시켜 놓고 있는 것에 촉발된 것이다.
지난 100년 속에서 우리 민족의 오랜 영웅적 문화 창조운동의 힘은 소진되고, 바닥에 가서 닿았다. 식민지시대를 끝장내는 인류의 양심법정 2차대전이 끝나면서 위대한 우리 선행세대가, 쇠퇴가 기정사실이 되고 만 운명의 손에서, 민족생명의 주도권을 탈환하는 대역사를, 인류양심의 진운의 도래와 함께 이룩해 내었다. 일본제국주의 앞에서 감추어졌던 민족의 정신적 에네르기의 고갈할 수 없는 축적은 드디어 분출의 출구 앞에 서고야 말았다. 한국문명의 ‘프로메테우스(의미는 先見)적 약진’(토인비)이 시작된 것이다.
샤 교수가 이 조짐을 80년대에 일본의 한복판에서 읽어낸 것은 예사롭지 않다. 그가 한일 역전(逆轉)의 전기를 설정해 놓은 올해 2010년에, 서울에서 G20 정상회의가 열리게 된 것도 초(超)역사적인 어떤 묘합(妙合)을 느낀다. G20은 오래 운위되던 서구문명의 몰락의 현실화로 여겨지는 지금의 세계공황으로부터, 여태까지의 IMF로는 풀 수 없는 세계경제의 출구를 찾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인류사 앞에 새 진로를 열어젖히는 개척자의 사명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장은 서울에 선다.
샤 교수는 일본 추월의 요인으로 든 한국인의 강인성을 고난의 역사와 다음과 같이 연계시키고 있다.
“지금의 한국의 젊은이는 왜 정열에 불타고 있는가? 하나의 요인은 오래 계속된 고난의 역사에 시달려 괴로움을 당해 왔었기 때문이다.
열의뿐 아니라 포식 속에 사는 일본의 젊은이와 고통 속에 살아 온 한국 젊은이의 사람으로서의 강인성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요새 우리 젊은이들이 이러한가?
전진의 에너지는 苦의 역사 속에
앞의 추월요인의 총론 부분에서, 샤 교수는 ‘제2차대전 후 일본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무이해’를 지적하고 있었다. 그의 얘기를 종합하면,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무이해란, 일본 때문에 한국인들이 겪은 고난의 역사에 대한 일본인들의 무이해를 말한다. 한국과 일본역사에 대해 객관적일 수밖에 없는, 대만출신 샤 교수의 ‘무이해’ 지적은 충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무이해’가 일본인들의 과거에 대한 후회, 반성, 사과, 참회를 어렵게 하고 있다. 나아가서는 일본사람들이 과거 청산의 결정적 계기인 1965년의 국교재개를 ‘청산’없이 돈의 힘으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들은 한국에 대해 죄지은 것 없고, 빚진 것 없다는 입장을 마지막까지 관철했다. 그들끼리는 외교승리라고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과정을 통해 일본의 지배계층이 근대에 이어 여전히 ‘도덕적 정념이 결핍’된 집단임을 세계만방에 공지시켰음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패망하고 나서, 신생 일본이 닻을 올렸지만 과거청산을 하지 못해, 윤리적 재생에 실패하고 나니, 국제장리에서 윤리적 입각점을 마련치는 못했고, 경제 덩치에 걸맞은 정치리더십은 일본과 무연했다.
일본은 2005년 UN개혁에서, 안보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어 보고자 했다. 경제대국답게 돈도 쓰고 공도 들였다. 그러나 일본의 이웃인 아시아의 나라들은 하나도 표를 주지 않았다. 이 같은 결과가 ‘과거청산’과 유관한 것임을 지금쯤은 일본 지도층들이 알 법한데, 자각의 몸짓은 없다.
샤 교수의 통찰력을 받아들이고, 중국의 국부(國父) 손문(孫文)의 어법을 빌려, 여기서 한마디 하겠다. 손문은 최만년에 일본에 들러, 일본이 근대화와 함께 조선을 강탈하고, 만주를 잠식하는 등 군국주의로 경사하는 것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갈파했다.
“일본이 서방 패도(覇道)의 앞잡이가 될 것인가, 아니면 동방 왕도(王道)의 간성(干城)이 될 것인가, 그것은 일본 국민이 신중히 택하면 될 일이다.”
중국 G2의 시대가 왔으니까, 한 세기 전 조선을 보호국으로 했을 때 정도의 결단이 지금 일본에 있어야 할 것이다. 일본이 과거청산을 두고서 ‘계속 유보하여, 그 옛날 좋던 시절’의 회상을 즐기며, 한국인을 끝없이 분발시키는 반면교사로 남느냐, 아니면 청산하고 거듭나서 한국인과 한마음 되어 동아시아 평화구조 구축에 나서느냐, 일본국민들이 신중히 택하면 될 일이다.
그러자면 역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정리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역사인식 공유는 이토 히로부미 청산으로
일본 NHK TV가 지난 4월 18일, 한국 ‘병합’ 100년이라고, 한일문제 특집방송을 했다 해서, 구해 보았다. 프로그램은 서두에서 ‘미래의 열쇠는 역사 속에 있다’면서, 한일 양국의 역사인식의 갭을 메워 보겠다는 특집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1시간짜리 특집의 끝부분에서 지역공동체의 세계적 추세도 들먹이고 있다. 전체로는 말만 나와 있는 동아시아 공동체라도 해 보자면, 역사인식부터 같이해야 한다는 강조로 들렸다. 이 ‘망국체험 100년 특별연재’의 하나의 목적도, 100년 되는 올해를 맞아, 한일 두나라의 공동의 미래일 수 있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향해, 단서라도 하나 잡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 측이 ‘병합’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는 역사사실에 대한 양국의 인식이라도 한번 일치시키는 일이다.
예로서 NHK도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보이는,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병합’ 관련 역사인식을 들어본다.
“당당한 수천 년의 문화를 가진, 그리고 수천 년이나 독립해 온 나라를 말이죠, 눈도 깜짝 않고 병합해 버렸어, 병합이라는 모양으로 상대의 나라를 빼앗아 버렸어. 이와 같은 우열(愚劣)한 짓이 일·러전쟁 다음에 일어난 것입니다.”(<昭和라는 國家>, NHK Books)
일본작가 시바(司馬)가 ‘병합’을 ‘상대의 나라를 빼앗아 버린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 상대의 소유를 빼앗는 것은 강탈이 아닌가?
주체가 넥타이를 매었건, 실크햇을 썼건, 강탈은 강도의 행위다. 강탈한 강도가 당한 상대한테서 승낙했다는 징표로 도장까지 받아 낸 것이다. 세월이 흘러 강도짓을 부끄러워해야 할 세상이 되었어도, 그때 승낙하는 도장까지 찍었으니 강도짓은 합법이라 뻗대고 있다.
NHK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심판한 안중근을 통해서도 그 시절이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하고 있었다. 그 시대뿐인가, 지금도 정글은 약육강식이다. 그때에 이미 윈조약 같은 것이 있어서 조약에 강제성이 있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인식수준이 제국주의자들 간에도 있었던 것 아닌가.
동일평면에 세운 가해자와 피해자
그런데도 NHK가 역사인식의 갭을 메워 보겠다면서, 약육강식의 시대를 입에 올리는 것은 하나 더 의도가 있다는 얘기다. 그것은 역사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윤리적으로 동일평면에 놓고 얘기해 보겠다는 것 아닌가.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시도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일평면에 서서 읊어대는 자기 변해에 어떤 일치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작가 시바는 조선을 식민지로 한 것을 두고 다음과 같이도 얘기한다.
“욕심 많은 농사꾼이 이웃 논을 약탈하듯이, 그저 조선반도를 집어 챙긴 것뿐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윤리 판단이 들어 있다.
NHK가 ‘병합’ 백 년을 맞아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가꿔 보고자, 한일 간의 역사인식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시바의 윤리판단 정도도 딛고 서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국민의 평균적이고 표준적인 역사인식의 형성과 관리에 힘을 쏟는 것으로 보이는 NHK가 이렇게밖에 못하나 싶으니, 어떤 절망감을 피할 수가 없다.
NHK의 특집은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하는 국면을 그려 놓고서는, 통감이 된 이토(伊藤)가 저지른 한국의 주권유린은 들먹이지도 않고, 내정을 개혁하고, 나아가서는 최신 연구라면서, 한국에 의회를 구성하는 등으로 자치식민지까지 구상하고 있었다고, 이토의 한국을 향한 선의를 비추려 들었다. 이토의 구상은 한국사람들의 몰이해와 지나친 내셔널리즘으로 벽에 부딪혔고, 병합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NHK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미련을 알 수는 있다.
그는 일본 메이지(明治)근대화의 최대의 공로자였다. 메이지헌법에서 천황은 현실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천황의 권위를 정치현실에서 대신 행사하는 역할자로 원로들이 있었다. 모두 메이지유신의 원훈들이었다. 그 정상이 이토 히로부미였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탈함으로써, 서양형 제국주의를 완성하고, 메이지근대화를 완결했던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당연히 대한제국을 강탈하는 현장의 주도자였다. 조선식민지화 최고의 공로자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한 지 겨우 10년 되는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의 원칙을 내놓자 제국주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일본은 서양근대에서 제국주의와 마키아벨리즘만 보았지, 휴머니즘(인도주의)의 전진을 보지 못했다. 1910년에 완성을 보았던 일본제국이 겨우 35년 만에 패망한 것은, 근대일본 문화의 인식능력의 한계와도 관계가 있어 보인다.
지난 1월호에서 일본제국이 조선을 깔고 앉아 패망하게 되었다고 했지만, 근대사와 조선 삼키기에 제일 큰 공이 있는 이토의 국가전략은 반 세기도 내다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이 지금부터 100년, 공동의 미래를 여는 열쇠를 얻고자 한다면, 청산하기에 이토 히로부미만 한 사람도 없을 것 같다.
가쓰 가이슈의 이토 비판
가쓰 가이슈(勝海舟)는 에도(江戶)시대의 말기와 메이지기(明治期)에 걸쳐 일본을 대표하는 현자(賢者)로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구체제의 막부군과 신체제의 유신군이 에도성에서 결정적으로 대결하게 되었을 때, 오고 있는 일본의 새 시대를 향해 에도성을 무혈로 열어준 사령관이었다. 지략이 있었고, 무비가 충분했지만 100만명의 도시 도쿄를 전화(戰禍)에서 건지는 쪽을 가이슈는 택했다. 일본에 닥쳐와 있는 영국, 프랑스 등의 외압 앞에서, 스스로가 속한 막부체제의 문을 닫고 전체 일본의 체력을 온존하려 들었던 것이다. 시대와 대국을 볼 줄 아는 혜안을 일본의 역사가들이 평가한다.
이 가이슈가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에 대한 가장 매운 비판자였던 것이다. 가이슈는 유신 주류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일본해군을 창설하기도 했는지라, 해방(海防)과 국가진로에 일정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가이슈(海舟)가 백작이란 작위를 받았을 때 이토는 총리대신이었다. 이때를 전후해서 그는 2차에 걸쳐 이토 앞으로 정치 의견서를 보냈다.
이 속에서 가이슈는 이웃나라와의 신의를 중히 여기고, 서양만 따라가지 말고, 전통 속에서도 지혜를 얻으라고 강조했다. 나아가서는 ‘지술(智術)과 서양법(法)’만으로 온전한 나라는 되지 못하니, 이토의 정치 자세를 ‘성의와 착실’로써 다지도록 주의를 주고 있다. 헌법을 만들고 서양식 부국강병에 의심 없이 몰두하던 이토는 가이슈를 받지 못했다.
일본은 종내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청일전쟁은 일본이 단순히 조선반도로 세력권을 확장하기 위해 벌인 전쟁 정도가 아니었다. 일본 근대화의 국민교사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청일전쟁을 ‘문야(文野)의 전쟁’이라고 바람을 넣었다. 문야란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후쿠자와가 조선의 갑신정변을 지원하다 실패하고서 이른바 탈아론(脫亞論)을 부르짖은 것은 1885년이었다. 아시아 촌것들하고 같이 못 놀겠으니까, 이제부터 일본은 서양하고만 상대하고, ‘조선이나 중국에 대해서는 서양사람들이 아시아 사람 대하듯이 대하자’는 것이 탈아론이었다. 한 10년 가까이 지나 일어난 청일전쟁을 일본의 어떤 사가는 탈아론 입문전쟁이라고도 한다. 서양물 좀 먼저 먹었다고 이웃인 조선, 중국에 대한 경시와 모멸이 극에 달한 시점에서 일본은 군홧발로 반도와 대륙을 짓밟았던 것이다.
이때의 일본책임자가 총리 이토 히로부미였다. 앞에서 본 가이슈는 청일전쟁을 무명(無名·명분 없는)의 전쟁이라고 강한 어조로 반대했다.
가이슈는 유신 전부터 한·중·일 삼국 동맹론자였다. 동아시아 3국이 대등하게 단결하여 구미의 침략을 물리쳐야 한다는 원칙적 입장을 죽을 때까지 일관했다. 일본을 아시아 맹주로 올려놓은 이토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의 동양평화론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가이슈의 3국동맹론은 안중근이 옥중에서 밝힌 동양평화론과 근본 발상이 같은 것이었다.
가이슈가 청일전쟁 전후에 일본의 조야를 향해 특히 강조한 것은 중국과 조선에 대한 외경(畏敬)이었다. 가이슈는 중국이 나라가 한 번 전쟁에 졌다 해도 사회는 미동도 하지 않는 강인함이 있으니 가볍게 보지 말라고 경고했다. 조선에 대해서는 ‘어제의 일본의 스승 아니냐’고 모멸론자들을 나무랐다.
가이슈는 반도로 대륙으로 군홧발을 뻗는 이토의 부류를 보고, ‘조선이나 중국을 때리거나 바보 취급하는 것이 근대국가라 한다면 일본은 근대국가를 안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까지 했다는 것이다.(松浦玲, <明治の 海舟とアジア>, 岩波書店)
에도무혈개성(江戶無血開城)이라는 일본 사상 최고의 드라마를 연출한 가이슈의 혜안은, 수천 년의 형제 같은 이웃을 침략하는 이토식 탈아적 국가운영의 끝이 민족국가의 패망일 것임을 내다봤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시대의 지상명령이었던 근대화까지도 말릴 수 있는 신념은 생겨났을지 모른다.
이토, 피카로의 청춘
도쿄대학 출신의 영문학자 사에키 쇼이치(佐伯彰一)가 <근대일본의 자전(自傳)>(中公文庫)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청춘은 피카로(악당, 건달)풍이었다고, 실화를 들어 그려 놓았다. 이를 통해 사에키(佐伯)가 드러내려 한 것은, 메이지 일본을 끌고 나간 이토 같은 ‘유신의 공신’들이 대개 조폭적 멘탈리티로 행동했고, 도덕적 정념이 모자랐다는 것이다. 먼저 이야기를 들어 본다.
22세의 청년 이토는 외국(夷)이라면 뭐든지 반대하는 양이(攘夷) 과격파 지사였다. 이해에 이토는 두 가지 큰 사건에 관여한다.
도쿄만을 내려다보고 도쿄 시나가와 언덕에 신축해 놓은 주일 영국공사관을 이토는 동향 사무라이들 8, 9인과 함께 불 질러 태워 버렸다. 외인(外人)들의 부아를 지르고, 막부를 외교적으로 난경에 빠뜨리겠다는 계산이 패거리의 상급 사무라이들에게 있었겠지만, 이토로서는 양이 유행에 끼어들어 한 건 올리는 기회였던 것이다.
뒷날 스스로 회고하여 ‘대거 방화의 대죄를 범하고서 형(刑)을 피하는 것은 고금에 드문 얘기인데, 강노(强弩)도 끝장에 가면 노호(魯縞·중국 산둥서 나는 아주 얇은 비단)도 뚫지 못하듯, 막부의 형세는 이 지경이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방화의 대죄’라는 세상의 상식은 인정하면서도, 그 책임이 막부의 약체성에 있는 양, 스스로의 죄의식은 털끝도 비치지 않고 있다. 이 코멘트가 관심을 끄는 것은, 훗날 이토가 한양의 궁중에 나타나 조선의 국권을 강탈해 들어갈 때의 심보가 이와 흡사하지 않았나 싶어서이다.
이토의 조폭의 하수인 같은, 피카로(악당)의 청춘의 업(業)은 더 있다. 영문학자 사에키가 100년이 더 지났는데도, 메이지 최강의 권력자인 이토의 소행에 양심의 필주(筆誅)를 가하듯 하는 그 필치가 인상적이라서 여기 그대로 옮겨 보겠다.
“양이 과격파 이토에게는 더욱 컴컴하고도 ‘더러운 손’의 과거가 있었다. 방화자였을 뿐만 아니고, 그는 테러행위의 실행자였고, 살인자였던 것이다. 그것은 방화사건과 같은 해 같은 달의 행위로서 우노 도오(宇野東)와 하나와 지로(滈次郞)를 연달아서 해친 두 건의 암살사건에 가담했다고 일러지고 있다. 특히 후자인 하나와의 살해는 음험하고도 잔혹하다 해야 할 것으로, 변호의 여지가 전혀 없다. 하나와가 막부의 명령으로 사상(史上)의 폐제(廢帝)의 실례를 조사하고 있다는 소문이 떴다. …조사란 풍문일 뿐이었다. 아니, 날조된 데마(demagogy)라는 게 더 맞다.”
정치암살의 인연법
이토의 테러행위는 날조된 데마에 근거한 경거망동이었을 뿐만 아니고, 정치권력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는 무력한 학자를 노려서 참살한 것이었다.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 미리 방문하여 가르침을 구하는 책략을 썼다고 한다. 정치적 암살로서는 가장 혐오스러운, 부끄러워해야 할 타입의 암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시의 일본은 과연 암살 다발(多發), 테러 유행의 광기의 계절이었다고는 해도, 너무도 음험하고 구제 여지가 없다.
어쩌다가 한 시인이 이토의 사건에 접해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두에서 암살당한 것에 일종의 인연이란 감을 나는 갖는다. 범인인 안중근은 조선민족한테는, 지금은 천하에 당당한 열사로 되어 있다’라고 쓰고 있지만 필자인 나도 서로 같은 감회를 억누르기 어렵다. 지난날의 살인범, 정치적 암살자가 또 하나의 암살자의 손에 걸려 거꾸러지게 되었으니 불가사의한 ‘인연’의 연쇄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나, 정직하게 말해 양자를 같은 정치적 암살자로 보더라도, 안중근 쪽이 그 동기에 있어서나 실행에 있어서도 아득히 상수에 위치한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近代日本の自傳>, 中公文庫)
일본에도 눈은 있다. 인용이 좀 길었던 것은, 악당의 소행을 나중에 출세했다고 시대와 상황을 핑계 삼아 얼버무리는 것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여 양심의 잣대를 들이대는 안목이 일본에 있다는 것을 실감 있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메이지 주역들의 과대망상
위의 인용은 앞에서 본 NHK의 4월 18일자 특집처럼, 오래 교류해 온 이웃나라에 대한 일제의 국권침탈은 당시의 국제상황이다. 약육강식 시대를 들어 물타려고 드는 것이 일본 전부는 아닌 것을 알게도 해 준다.
앞의 사에키가, 당시 22세인 이토가 연달아서 테러행위에 빠져들어 간 이유로서 들고 있는 것은 심리적 요인이다. 이토는 출신이 미천했다. 농사꾼 아들인 이토는 원래 사무라이 세계에는 끼어들 수 없는 것이었다. 이토가 10대 초반이었을 때, 그의 부친이 말단 무사 가문에 입적을 하게 되어, 그때부터 약삭빨랐던 소년 이토는 상급 사무라이들의 심부름이라도 할 수 있는 형편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윗사람에게 잘 붙는 편이었다. 청춘의 입구가 막말(幕末)유신의 격동기와 겹쳐, 머릿수를 채워야 할 상황에서는 상급 사무라이들과 같이 뛸 기회가 많았다. 신분상의 열등감을 보상하려는 욕구에 불이 붙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토는 놓였던 것이다. 새까만 말단 신참이었으니, 뭔가 하나 더 강력한 자기증명의 액션을 찾아 혈안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는 외국공관에 불 지르고, 칼 없는 학자를 베었던 것이다. 이토는 출세의 사다리를 오르는 길을 이같이 열었던 것이다.
이토의 행태는 일본이 수천 년의 이웃 조선을 군대가 보잘것없다고 쳐들어가서는 깔고 앉아, 제국주의를 완성했다고 뽐내는 것하고, 어딘가 닮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쇼와기(昭和期, 1926~1989)에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학자의 한 사람으로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 1873~1961) 교수가 있었다. 일본의 상대(上代) 천황들 중, 초대부터 14대까지가 후세에 날조된 것이라고 연구 발표를 했다가, 쇼와군국주의 시대에 탄압을 받아, 대학강단에서 쫓겨나고, 유죄판결도 받은 학자다(早大교수, 전후에 문화훈장). 그는 한 연구에서 일본의 국민사상을 분석하는 중에 유신 전후의 이른바 지사(志士) 낭인(浪人)들의 행태를 적출해 놓고 있다. 당파적으로 부설(浮說)을 경신하고, 진실을 알아볼 생각이 없다는 것, 살벌한 기풍, 일종의 허영심, 시기심, 그리고 자기 약소감을 갖는 일방에서, 자기가 손만 대면 대사는 성사되고 천하는 순식간에 움직일 것이라 생각하는 과대망상적 행동욕(이 대목은 이토가 한국을 침탈하여 서울에 와서는 통감정치가 조선사람으로부터 박수를 받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을 연상케 한다) 등이다. 앞의 사에키는 쓰다의 분석이 ‘정치적 암살자로서의 이토의 케이스에 그대로 딱 들어 맞는다’고 했다.
이토의 강탈행
한국의 주권을 뺏아 보호국으로 하기 위해 한양으로 가는 이토에게 일본 천황이 내린 칙명은 ‘한국황제 위문을 생각하사 특파대사로서 차견(差遣)함‘이었다.
9명의 공식 수행원 중에는, 1875년 강화도를 침략한 운양호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 해군대장도 있었다 1905년 11월 9일 밤에 도착했던 이토는 다음 날 경운궁(慶雲宮, 지금의 덕수궁) 수옥헌(漱玉軒)에서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천황의 친서를 봉정했다. 이토는 연이어, 품고 왔던 본론을 고종황제에게 펴 놓고자 내알현(內謁見)을 원했다.
그 자리는 11월 15일 오후 3시반에 만들어졌다. 이토가 국권을 뺏고자 고종을 강박해 들어간 언사와 이에 응수한 고종의 언사의 구체상을 한번 보았으면 한다.
이토는 일본인 기록자를 대동했고, 한국인 통역이 있었다. 수작의 대강은 이토의 복명서(1905년 12월 8일)에 붙어 있는 일본 측이 작성한 고종(高宗)-이또(伊藤) 간 대화록인 ‘내알현시말(內謁見始末)’에 있는 것이다.(海野福壽, <外交史料 韓國倂合>, 不二出版社) 고종은 무엇보다도 먼저 을미(乙未)사변(閔后암살)의 통한을 말했고, 전해에 일·러전쟁이 시작되고서 바로 이토가 다녀간 후, 일본이 내정개혁을 도와준다고 하고 나서 생겨난 작폐와 일·러전쟁으로 한국 땅에 주둔한 일본군으로 인한 민중의 고통을 들어가며 다음과 같이 말을 맺었다.
“이젠 우리 상하로 하여금, 일본의 태도를 의심케 하고, 악감정을 일으키게 되어 버렸소. 시험 삼아, 경(卿·이토)이 한번 역지(易地·입장을 바꿔)하여, 현재 우리나라가 조우하고 있는 지위에 처해 본다면,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오.”
이 말에는 답하는 바 없이 ‘위문특사’ 이토는 대뜸 고압적으로 돌변하여 말했다.
“그렇다면, 폐하 시험 삼아 물어봅시다. 한국은 어떻게 해서 오늘에 생존하는 것을 얻었습니까. 한국의 독립은 하인(何人)이 내려주었는가, 이 일사(一事)입니다. 폐하는 이 일을 알기라도 하고서, 그래도 아직 더욱 이 같은 어(御)불만의 말씀을 흘려 내려주시는 것이옵니까.”
고종은 화도 안 내고, 여전히 10년 가까이 되어 가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들먹이며 “한때의 기의(機宜·상황적 편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변명조로 늘어놓자, 이토는 이미 기는 꺾었다고 생각했던지, 통역을 도중에 끊고, “폐하로부터 역사얘기 듣는 것은 타일로 미루고 사명의 대체에 관해 아뢰겠다”면서 “귀국에서의 대외관계, 이른바 외교를 귀국(貴國) 정부의 위임을 받아, 우리 정부 자신이 대신해서 이를 행하겠다”고 바로 들이댔다. 잔소리 말고 지갑부터 내놓으라는 식이다.
이에 황제는, “대외관계 위임의 일사(一事), 굳이 이를 절대로 거부함이 아니라 할지라도, 요는 다만 그 형식을 남겨, 내용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여하이 협정하든지 간에, 결단코 이의 없는 바이로다”라 했다. 고종은 이미 반쯤 주저앉은 상태지만, ‘형식’을 들어, 외교실제야 너희가 이미 뺏어 고문이다 뭐다 붙여 마음대로 하고 있으니, 독립국가의 허우대라도 남겨 달라 한 것이다.
이토는 “기타 일체의 국정에 이르러서는 물론 귀정부의 자치에 방임하기 때문에, 하등 국체상(國體上)에 이동(異動)이 생기는 것이 아니옵고, 감히 폐하를 속이고, 우리나라 이익을 취하는 것도 아니옵니다”라 했다. 뒷날 이토가 통감으로 행한 짓하고 비겨 보면 너무도 엉뚱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이나오리 강도’
그래도 황제는 ‘형식’을 놓지 않으려고 “경(卿)의 알선 진력에 기대하는 바이오”라며 강탈주체 이토에게 선의가 있을 것이라고 애소하듯 매달렸던 것이다. 굳이 이를 옮기는 것은 나라가 내려가면 어디까지 내려가는지 요즘 사람들이 한번 알기를 바라서이다. 이토는 오히려 동갈(挏喝)의 도를 높이고 나왔다.
“본안은 제국정부가 갖가지 고려를 거듭하여, 이제 와서는 촌호(寸毫)도 변통의 여지없는 최종안으로서 … 폐하께서 승낙하든 거부하든 마음대로이시지만, 만약에 거부하신다면, 제국정부로서는 결심하는 바가 있사옵니다. 그 결과는 나변에 달하겠사옵니까. 대저 귀국의 지위는 이 조약을 체결하는 것 이상으로 곤란한 경우에 빠지고, 한층 불이익한 결과를 각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조폭들의 공갈도 이보다 더 무지막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다가 고종은 한 번 더 “인민의 의향도 알아보고…” 했다가 이토한테 닦아세워지지만, 끝내는 한국 쪽의 의사결정 및 양국 간의 조약 맺는 절차와 방식을 이토 하자는 대로 맡기고 지시해 버린다. 국권강탈에 문을 열어주고, 승낙된 강탈임을 위장케 하는 도장까지 찍어주는 판이 연이어 벌어졌다.
위에서 보았던 고종과 이토의 대담을 보면, 이토는 시작과 동시에 예상과 상식을 뒤집어 고종의 기를 흩어, 공포심을 일으켜 놓고서, ‘강탈 품목’, 주권 포기를 들고 나왔다. 끝내기는 국가를 두고서 최악(最惡) 수준 가학을 암시 협박하여 차악적(次惡的) 강탈을 피해자가 스스로 감수케 하는 식으로, 한국의 주권자 상대의 강탈행을 해치운 것이다.
처음 면대하자 고종은 “민후(閔后) 암살과 일·러전쟁 이후 한국에서 일본이 벌인 일들로 한국 조야는 일본을 믿지 못하고, 악감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고종은 당연히 ‘위문특사’ 이토의 우호자세를 기대하고 실정을 호소하여 개선의 계기를 잡아보려 했을 것 아닌가. 이에 대해 이토는 대뜸 “오늘 한국의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은 누구 때문인지 알기라도 하느냐”며 생살여탈권이 자기 손에 있다는 식으로, 일거에 ‘이나오리(居直り) 강도’의 자세를 취하고 나왔다. ‘이나오리 강도’란 한국말로 유사어를 찾기 어려운데, 직역하면 ‘좀도둑이 현장을 들키자 갑자기 강도로 돌변하는 것’이다.
고종의 상식적 문제제기에 대한 이토의 대응은 ‘이나오리 강도’적이었다. 그것은, 그 전 두 번에 걸쳐 방한하여 한국과 고종한테 취한 자세와 그가 만든 친근무드를 상기하면 즉각 알 수 있다. 이토가 서울에 와서 고종과 만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이토와의 첫 만남에서 을미사변 거론 못한 고종
첫 번째는 이토가 세 번째 내각을 끝내고, 2개월여의 장기 중국여행을 가는 길에 2주간 한국에 체류했을 때였다. 1898년 8월 말에서 9월 초에 걸쳐서다. 이때 그는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부인한테 띄운 편지에 “황제 및 정부 인민으로부터 생각 밖으로 친절한 대우여서 꿈 같은 심지(心地)였다”고 썼다.(伊藤博文傳)
‘생각 밖으로 친절한 대우’가 무슨 말인가. 민후암살(閔后暗殺)은 불과 2년 전, 이토의 총리 재직 때였고, 암살을 지휘 결행했던 한국주재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의 임명권자는 이토였던 것이다. 미우라가 군사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조처해준 것도 이또 총리였다. (金文子, <朝鮮王妃殺害와 日本人>, 高文硏) 일본은 암살에 가담했던 폭도 48명을 면직된 미우라(三浦)와 함께, 히로시마(廣島) 지방법원에 데려다가 재판했으나, 증거 불충분이라고 면소(免訴)처분, 모두 방면해 버렸다.
총리 재임 중에 일어났고, 석연치 않게 뒤처리된 이 암살 사건을, 한국에 오면서, 그리고 지아비 고종황제를 만나면서 이토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에 고종은 이 문제를 입이 올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생각 밖으로 친절한 대우’는 이래서 나온 말일 것이다.
이토가 두 번째로 고종과 만나는 분위기를 본다.
일·러전쟁의 선전포고는 1904년 2월 10일이었다. 개전하자마자 일본은 한양부터 점령하고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한국땅을 수용하여 군사기지로 하고 한국사람을 군수인부로 동원하는 등 한국을 일본의 전쟁체제에 끌어넣기 위한 것이었다. 엄청난 침략행위였다.
의정서에는 한국 황실과의 친의(親誼)를 가꿀 것, 그리고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보장하는 조문이 있다. 이 바탕 위에서 이토는 한국에 ‘황제 위문특사’로 3월 중순에 파견되었던 것이다. 개전과 함께 고종의 총신(寵臣) 이용익 등 러시아와 가까웠던 요인들이 대거 몰려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고, 일본군의 군사작전에 따른 민중의 불만이 높아지자, 일본정부는 최고의 문민카드 이토를 서울에 보내기로 한 것이다.
이때에 이토는 10개조에 걸쳐, 고종황제 앞에서, ‘동양평화’유지, 서양문명 수용과 개혁의 원칙, ‘침략적인 서양인’ 러시아 배제 등을 강의하듯 늘어놓았다. 이 속에는 “한국황제가 우리 일본과 존망을 함께하고, 동양평화의 유지 방책에 협동한다면 … 오래 한국의 산하를 폭진(暴秦-러시아)의 장중에 떨어지지 않게, 마치 일본 자체의 존망과 같이하여…서로 안위존망(安危存亡)을 함께하고… ”라는 문구도 보인다.
“한황(韓皇)은 이를 가납(嘉納)하사, 공(公·이토)의 원래(遠來)의 노고를 많다 하시고, 손수 대훈(大勳) 금척대수장(金尺大綬章)을 수여하시고, 그날 밤 대관정(大觀亭)에서 향찬을 내리셨다”고, 이토의 공식전기인 <이등박문전>(伊藤博文傳)(春畝公追頌會편, 原書房)에 보인다.
이 정도면 고종도 이또와 친근이 쌓였다고 믿었을 것 아닌가. 그러고서 불과 1년 반쯤 지나, 전쟁도 끝나고 이번에도 ‘위문특사’로 왔기에 전날의 언사와 우호무드를 믿고, 한마디 했더니, ‘누구 때문에 숨이라도 붙어 있는지 아느냐’로 나온 것이다. ‘이나오리 강도’의 전형을 이때의 이토에게서 본다. ‘서로 안위존망(安危存亡)을 함께하고’라 한 게 언제인데. ‘이나오리 강도’의 기습 앞에 누구든 억장이 무너지고, 기가 산란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상대가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이긴 나라의 최고권력자이고 보면. 실은 이 모든 판이 조선땅을 군사점령하고 있는 일본 손바닥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에 고종이 다시 한번 눈 뜨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군사력에 의한 국권 강탈판이 기본이었던 것이다.
도덕적 저능아 이토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때 이토의 대응에 부답(不答)의 공갈이 동시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종은 그전 두 번에 걸쳐 만났을 때까지는 건드리지 않았고, 그동안 “신료(臣僚)는 물론, 종친에조차 입떼지 않았던 것”을, 이번에는 몇 번의 만남이 만들어 낸 친근무드를 믿었던지 끄집어 냈던 것이다. 고종이 어찌 몽매에라도 명성황후 문제를 잊을 수 있었겠는가. 당시 한국정부는 사건을 대원군과 왕궁경비 훈련대의 소행으로 몰아, 세 사람의 훈련대 사관(士官)을 암살자로 처형했다. 당시의 친일정부가 일본측에 농간당한 것이다. 고종은 해가 바뀌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자마자, 사건진상조사부터 지시했다. 사건의 진상을 반년도 안가 고종은 파악했다. 그리고 미우라 공사를 비롯한 일본 폭도들이 귀족 작위도 회복하고, 징벌되지 않았을 뿐더러, 일본사회가 영웅시한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일본 측은 배후를 미우라에서 끊었지만, 고종은 믿지 않았을 것이다. 내알현 자리의 눈앞에 있는 당시의 일본 내각총리대신 이토는 원천적, 도의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이므로 뭔가 한마디 할 거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고종은 “…생각이 이에 미치면 너무도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하기 그지없다.”고까지 했던 것이다. ‘위문특사’ 이또는 위로와 사과는커녕, 일거에 ‘이나오리 강도’의 자세로 돌변한 것이다. ‘암살 문제’의 거론에는 부답인 채, ‘이나오리 강도’로 말을 받음으로써, 공갈메뉴에 일거에 ‘암살’을 올리는 형국을 이토는 고종을 상대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토의 도덕불감증에 대해서는 하나 더 짚어 둘 것이 있다. 1990년대에 번역되어 한국에서도 화제를 일으켰던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의 역작 <민비(閔妃)암살>의 끝 부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민비의 유체 옆에 있었던 일본인 중에, 동포인 나로서는 쓰기가 어려운 행위가 있었던 것이 보고되어 있다. 전 법제국(法制局) 참사관으로, 당시 조선정부의 내부(內部·내무부) 고문관이었던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가 법제국장관 스에마쓰 겐초(末松謙澄)에게 보낸 보고서 속에 ‘참으로 이것을 붓으로 옮기기 견딜 수 없지만 …’이라 전제하고서, 그 행위를 구체적으로 써 놓았다.”
뭘 더 적시할 수 있을 것인가. 여러명의 일본인들 속에서 이 짓을 했다니, 이는 근대화했다고 떠벌렸지만 그때의 일본인들이 인간 미달의 인종임을 나타내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일본은 그 뿌리 깊은 야수적 야만성을 서양사람들한테만 감추려고 발버둥치다가 결국 망한 것이다.
조선의 국모(國母)를 향한 이 능멸을 왕정은 없어졌어도 조선사람들은 1000년이 가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한민족(韓民族) 전체의 상징에 가한 능멸이기 때문이다. 이 일을 여기 쓰는 것은, 위에서 든 보고서를 받은 스에마쓰는 이토의 사위로서, 이토 정보인맥의 핵심적 존재였다는 사실 때문이다.(佐佐木 隆, <伊藤博文의 情報戰略>, 中公新書) 스에마쓰가 책임 맡았던 법제국이란 일본 근대화 작업의 선도기관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참살당한 황후에 가해진 일본인들의 능멸을 절대로 모를 수 없는 이토가 고종이 황후 얘기 끄집어내니까, ‘이나오리 강도’의 자세를 취하고 나왔다는 것, 이건 뭘 얘기하는가. 메이지의 제일 문관 이토의 국권강탈자로서의 유능성과 도덕적 저능아성을 동시에 알려주는 것이다. 근대일본이 패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압축해서 이토 속에 있는 것은 아닌가.
남바라(南原)총장의 ‘도의국가론’
‘한국이 누구 때문에 살아 있는지 아느냐’가 스스로조차 기만하는 공갈임을 이토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토를 한국의 국권을 강탈하는 현장으로 내몬 사람은 러시아의 재상(宰相) 출신 강화조약 대표 위테였다. 일본이 포츠머스의 회담대표 외상(外相) 고무라(小村壽太郞)에게 훈령으로 내린 제일 첫머리 강화조건은 ‘한국을, 완전히 우리 (일본) 자유처분에 맡기는 것을 러시아가 약낙(約諾)게 하는 것’이었다. 일본이 무엇 때문에 전쟁했는지가 이 훈령 속에 있다.
이를 받아 고무라는 강화조건 개조(個條)의 제일 첫항을 ‘한국의 자유처분’으로 하였다. 일본은 한국을 미리부터 물건 취급이었다. 여기에 러시아 위테 대표가 제동을 걸고 나왔다. ‘일본국의 조치실행을 위해 한국 황제의 주권을 침해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을 추가하자 했다.
위테는 강경하게 “러시아, 일본 두 나라가 약속해서 ‘한 독립국을 망하게 하는 것 같은 모양’을 보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누가 봐도 정론인데 일본 고무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회의록에 “이 나라(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는 것은, 한국정부와 합의한 뒤에 이를 집행해야 한다는 것을 여기에 성명함”을 명기하는 것으로 결착되었다. 이토가 한양에 오기 두 달 전이었다.(吉村 昭, <ポ-ツマスの旗>, 新潮文庫)
따지고 보면 이토는 결국 위테의 문제제기 때문에 한양에 오게 된 것이다. 강탈하면서 강탈당하는 사람 도장까지 받아 내려 한 것이다. 위테의 경고를 거꾸로 실천하여, 강탈 공갈하는 이토의 정신에 남는 것이 없었을까. 안중근의 심판을 받을 때까지 4년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다.
황국사관을 정면에서 뒤엎어, 쇼와군국주의의 탄압을 받았던 쓰다 소우키치 교수를 앞에서 보았다. 그는 <문학(文學)에 나타난 국민사상(國民思想)의 연구>에서 ‘유신의 공신(功臣)’이라고 하는 자들에게는 ‘도덕적 정념이 결핍’해 있다고 했던 것이다. 일본의 논단에서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으므로 눈여겨 둘 필요가 있다. 쇼와 군부에 영합하지 않았던 정치학자 남바라 시게루(南原繁)가 도쿄대학 총장이 된 것은 광복하던 해 12월이었다. 도쿄는 아직 잿더미 속이었고 사람들은 땟거리를 구해 헤매었다. 교수건 학생이건, 기자건 의식 좀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망연자실해 있었다.
해가 바뀌어 일본의 기원절(紀元節)인 2월 11일, 남바라(南原) 총장은 구식대로 야스다(安田) 강당에서 성대히 기념식을 치르고는, 이 자리에서 역사에 유명한 ‘신일본문화(新日本文化)의 창조’를 연설 하였다. 그의 연설은 패전(敗戰)의 쇼크로 허탈상태에 빠져 있던 전 일본민족을 향해 국가재건과 정신혁명에 불을 붙이는 말들로 엮어져 있다. 연초에 천황이 스스로의 신격(神格)을 부정한 것을 들어, 남바라는 일본의 ‘종교개혁’이라 했고, ‘일본인과 일본문화의 해방’이라고 했다.
남바라 연설의 두 가지 초점은 ‘신일본문화의 건설’과 ‘도의(道義)국가 일본의 건설’이었다. 남바라의 연설은 총장의 학내연설치고는 예외적으로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일본이 고도성장을 통과하면서, 많은 사람이 “내 인생의 전기(轉機)는 남바라 연설이었다”라고 했다 한다.(立花隆, <天皇과 東大>, 文藝春秋)
역사는 근대 일본에 두 번 기회를 주었다. 한 번은 무력으로, 한 번은 경제력으로, 일본은 갈 데까지 가 보았다. 그런데 두 번의 기회 모두 일본이 도의의 문제를 무겁게 본 흔적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도의’ 같은 것 쳐다 보지 않아서 그 고지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과거 청산 없이 ‘도의국가 일본’ 없다
남바라 총장은 ‘일본재건의 근본적 기초는 도덕적 책임, 도덕문제에 있다’고도 했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지 100년이 되고, G2를 중국에 넘겨, 다시 한 번 새 출발을 해야 할 때를 맞아, 남바라 총장의 연설을 한번 상기할 수는 없는가. 우리는 남바라 총장의 ‘도의국가론’에 주목한다.
한국과의 과거를 청산치 않고 일본의 도의국가는 있을 수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사과를 할 만큼 했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사과가 있을 때마다, 물을 타는 ‘망언’을 갈구하는 유권(有權)대중이 있는데 무슨 청산이 되겠는가. 도의문제를 편의주의적으로, 기회주의적으로 접근해 봤자 부질없는 짓이다. 군사근대화는 독일 것 본떠 놓고 청산문제는 독일을 참고 못한다는 것인가. 이 ‘100년’에 일본이 다시 일어서 양 민족의 진정한 화해의 계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동아시아 공동체 얘기가 나온 지 제법 된다. 말만 떠 있고 출발점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대상국가들 속에 탈아(脫亞)국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 정신이 아시아를 떠나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탈아국가가 있기 때문이다.
탈아의 정신경향을 일본이 극복했는지 일본 엘리트들이 제일 잘 알 것이다. 역사가들은 청일전쟁을 일본의 탈아 입문이라 하고, 러일전쟁을 탈아 완결이라고도 한다. 더 정확하게는 러일전쟁으로 조선을 병탄하여 대일본제국을 완성한 것이 탈아 완결판인 것이다. 동아시아 공동체를 위해서는, 그러므로 일본의 탈아 극복이 필요하다. 아시아로 돌아왔음을 보여줘야 한다. 일본이 탈아를 극복했음을 알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일본이 이웃 아시아 나라 뺏은 원죄를 확실히 참회하는 것이다.
426억원. 지난해 KT&G의 기부액이다. 외국계 담배회사들은 기부금을 얼마나 냈을까. BAT코리아는 2억6,794만원, 필립모리스코리아는 8,843만원을 냈다. '마일드 세븐'을 파는 일본계 담배회사는 아예 한푼도 내지 않았다. 매출이 KT&G의 7~21.6%에 이르는 외국계 담배사들이 만약 기부금을 KT&G 수준에 맞췄다면 187억원을 냈어야 하지만 실적은 3억5,637만원에 그쳤다.
시장점유율에서는 40%대 진입을 바라보면서도 기부에서의 비중은 0.82%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할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거의 인식하지 않거나 한국은 가져가는 곳이지, 베풀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로 읽힌다.
외국계 담배사들은 이에 "본사 차원의 후원과 기부는 별도로 진행되고 있다"고 항변하지만 유독 한국에서의 기부가 짜다는 사실은 쉽게 수긍할 수 없는 대목이다.
지난 2009년 중 BAT그룹이 사회공헌과 기부에 투입한 금액은 1,400만파운드. 순이익 142억800만파운드의 0.98%를 차지했다. BAT코리아가 이 비율의 중간만 갔어도 2009년 기부금은 6억9,625만원이 돼야 했다. 한국에서의 기부금 납부는 그룹 평균의 38.5%에 불과한 실정이다.
PM코리아도 비슷하다. 필립모리스인터내셔널(PMI)이 발표한 '2008년 자선단체 기부내역'에 따르면 PM코리아가 한국의 자선단체에 기부한 금액은 14만1,265달러. 반면 일본에 기부한 금액은 62만1,050달러로 한국의 4.4배였다. 일본 담배시장이 한국보다 2.6배 정도 크다는 점을 감안해도 '한국이 홀대 받는다'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시장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필리핀(기부액 150만6,817달러), 태국(27만1,861달러)에서의 기부도 우리보다 많았다. 국민소득이 높고 담배소비도 적은 스위스(106만8,080달러)나 독일(30만1,039달러)에서도 기부금액은 한국을 앞섰다. 결국 외국 담배회사들의 한국에서의 기부는 KT&G와 비교한 절대액에서도, 다른 나라들과 비교한 상대액에서도 미미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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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기부가 적은 이유는 점유율이 안정궤도에 올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공들이지 않아도 소비자들이 알아서 선택해주고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인다.
외국계의 기부금은 앞으로도 크게 늘어날 것 같지 않다.
과도한 배당과 로열티로 인한 국부 유출, 낮은 기부금에도 수요가 계속 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어느 지역이 외국 브랜드 담배를 많이 피우고 국민경제에는 어떤 영향을 가져올까.
전국에서 외산 브랜드 담배가 가장 많이 팔리는 지역은 어디일까. 광주다. 점유율 51.4%(2009년 기준). 처음으로 50%를 넘어섰다. 경기도(49.1%)와 제주(43.1%) 역시 전국 평균 37.7%를 훨씬 웃돈다. 이들 지역의 특성은 두 가지. 젊은 층이 많거나 소비지역이라는 점이다. 특히 젊은 계층의 외산 선호도는 압도적이다.
열대야만큼이나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홍대 앞의 N클럽. 재떨이의 꽁초와 젊은이들의 입에 물린 담배를 동료와 둘이서 20분간 헤아렸다. 합해보니 모두 148개비. 단 3개비만 국산 브랜드였다. 클럽 내부뿐 아니다. 홍대 앞과 신촌 일대, 대학로의 편의점을 일일이 확인한 결과 젊은 층의 외산 브랜드 선호도가 적게는 80%, 많게는 95%까지 나왔다. 서울경제가 창간한 지난 1960년, 4ㆍ19세대들이 전국적인 양담배 배격운동을 벌인 것과 정반대 현상이다.
20~30대층의 양담배 선호는 단순히 기호품 선택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김윤태 고려대 교수(사회학)는 "시간이 흘러 젊은이들이 주력 소비계층으로 자리잡으면 외국 브랜드 담배의 점유율 증가는 물론 외국산 수입제품 전반에 대한 경계심이 희박해져 국산품 내수 기반 약화와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물론 사회적 가치관 혼란까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1971년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군나르 뮈르달은 중남미 쇠퇴의 원인을 공통의 이익을 위해 단결하기보다는 개인주의화하고 외국산 제품을 경계하지 않는 경향에서 찾았다. 한국시장에서 양담배가 딱 여기에 들어맞는다.
외산 브랜드의 확산에 따른 부작용은 이미 속출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잎담배 농가들의 경지면적과 생산량도 해마다 떨어지고 담배농가의 소득도 줄어들었다. 일부 외국계 회사들은 한국에 진출하며 '한국산 잎담배를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흘렸지만 10년이 넘도록 지켜지지 않았다.
외산 브랜드 담배의 확산에 따른 경제적 파장을 막을 길은 없을까. 일본의 사례가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에서 KT&G의 점유율이 2009년 62.3%로 전년도보다 3.8%포인트나 떨어진 반면 일본에서는 JT(재패니스타바코) 점유율이 전년보다 0.2%포인트 상승한 65.1%를 기록했다.
일본이 국산 브랜드 점유율에서 사상 처음으로 한국을 뛰어넘은 비결은 판촉ㆍ홍보 강화와 제품군 다양화. 2007년을 바닥으로 국내 브랜드 담배의 점유율이 매년 높아지고 있다. '양담배는 양담배로 맞선다'는 전략에서 영국제 다비도프를 위탁생산ㆍ판매하는 고육책을 사용하고도 이렇다 할 성과를 못 내고 있는 KT&G와 대조적이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쓰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란다.”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4·19와 5·16, 광주항쟁…. 질곡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체험한 어르신들은 누구나 이런 말씀을 한다.
평범한 삶을 지내온 이들의 삶이 한 권의 소설이라면, 양금덕 할머니(82)의 인생은 대하소설일 터다. 양 할머니는 소학교 6학년 때인 1944년 근로정신대로 일본 나고야 미쓰비시 공장에 끌려갔다. 월급 한 푼 못 받고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그런 할머니는 지난 14일, 미쓰비시중공업이 근로정신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협의체 구성에 합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제노동 66년 만의 쾌거이자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의 피땀 어린 노력이 11년 만에 이뤄낸 결실이라고 다들 축제 분위기였지만 할머니는 담담했다. 지난해 10월5일부터 광주 미쓰비시자동차 전시장 앞에서 매일 정오 진행되는 집회에 빠짐없이 참여해온 할머니는 66년 동안 참아온 울분에 비하면 삼복더위는 견딜 만하다는 표정이었다.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일본인들에게 착취당하고, 귀국해선 군위안부로 오인받으면서 66년을 참고 살아온 양금덕 할머니. 보상은커녕 사과 한마디 없는 일본이나,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을 방치한 정부나 모두 양 할머니를 울린 가해자다. | 김세구 선임기자 k39@kyunghyang.com
“무슨 말을 해도 (일본인이) 하도 무서운 사람들이라 못 믿겠어요. 협의체를 구성할 테니 불매운동이나 시위를 중단하라는데 완벽한 합의서를 써주기 전까지는 시위를 계속할 겁니다. 아유, 어디 한두 번 속았어야죠.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어요.” 고통스러운 기억이 하나하나 마음에 바늘로 새겨진 듯 양 할머니는 연도와 날짜, 인명과 지명을 또렷하게 기억하며 사연들을 풀어놓았다. 할머니의 기억은 고향인 나주의 대정소학교 6학년 교실로 거슬러 올라갔다. “1944년 5월20일 수업시간에 일본인 교장선생이 헌병과 함께 교실에 들어왔어요. 벌벌 떠는 우리들에게 교장이 ‘일본에 가면 중학교도 보내주고 돌아올 땐 집 한 채 살 수 있는 돈도 벌어올 수 있다. 가고 싶은 학생들은 손들라’고 했어요. 그때 급장인 저는 선발된 것만으로도 굉장히 자랑스러웠어요. 다들 가겠다고 손들었는데 키가 작거나 몸이 약한 애들은 안 뽑아줬거든요.”
중학 진학은 꿈도 못 꾸는 형편에 ‘일본 여학교 입학’에 ‘내 집 장만’은 황홀한 유혹이었다. 아버지 몰래 지원서에 도장을 찍고 큰언니에게만 일본 간다고 말한 뒤 집을 떠났다. 5월30일, 나주 대정소학교에서만 24명이 여수항에 모여 일본으로 향했다. 전남에서 141명, 충남에서 138명이 함께했다. 13~16세 소녀들이었다. 중학생으로는 근로 인원이 모자라 초등학생까지 데려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가려 해방 60년이 넘도록 그 존재조차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조선 근로정신대’의 시작이었다.
여수에서 밤배를 타고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다시 열차를 타고 마지막에 내린 곳은 학교가 아닌 나고야 미쓰비시 항공기 제작사. 소녀들에게 배정된 일은 시너나 알코올로 비행기 부품의 녹을 닦아내고, 그 위에 페인트칠을 하거나 줄칼로 다듬는 것이었다. 시너의 강한 독성 때문에 두통을 앓고 페인트가루 때문에 눈이 시리고 아팠다. 한겨울에도 장갑조차 지급되지 않아 손등이 터지고, 찢어진 상처에서는 피가 그치지 않았다. 병원 치료나 병가는 꿈도 꾸지 못했다. 일하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았기에, 다쳐도 다시 작업대에 서야 했다. 끼니라고 해야 푸석푸석한 ‘안남미’ 밥에 단무지, 된장국이 전부. 항상 허기가 졌다. 일본인들이 양동이에 버린 밥을 퍼 먹다가 “더러운 조센징!” 하며 발로 차이기도 했다. 화장실에서 줄을 설 때도 일본인들이 밀쳐내 10~15분씩 기다려야 했다. 할머니는 유독 구타도 많이 당했다. 다른 소녀들을 대신해 억울함을 호소했기 때문이다.
“학교에 보내준다더니 왜 일만 시키느냐고 따졌더니 ‘일이 익숙해지면 학교에 보내준다’고 하더군요. 자꾸 따지니까 뺨까지 때렸어요. 화장실에 가서 늦게 온다고 야단치기에 일하는 도중에 오줌을 싸버렸죠. 화내는 일본인 감독에게 ‘일본인들이 나를 밀쳐내 용무를 볼 수 없다’고 말하고 직접 화장실에 데려가 제가 줄 서서 당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 뒤에야 일본인들에게 줄을 제대로 서라고 지시하더군요.”
하루 10시간 이상의 고된 작업도, 굶주림도, 매일 밤 계속되는 공습의 공포에 비하면 견딜 만했다. 밤에는 공습경보에 방공호로 대피하느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44년 12월7일 지진이 나고야 일대를 강타했을 땐 6명의 소녀가 건물더미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할머니도 건물더미에 깔렸고, 옆에 있던 동료 두 명이 죽었다.
45년 8월15일. 여수 출신의 한국 아저씨가 ‘해방됐다’고 알려줬다. 해방의 의미를 몰라 물어보니 ‘전쟁을 안 하는 게 해방이다. 너희들이 울어야 집에 보내줄 테니 일본인들 앞에서 엉엉 울라’고 조언해줬다. 할머니가 또 대표로 나섰다. 숙소 앞 냇가에 가서 발을 동동 구르며 ‘집에 안 보내주면 빠져 죽겠다’고 울부짖었다. ‘밀린 임금은 고향집으로 보내주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두 달이 지난 10월21일, 근로정신대 소녀들은 부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18개월 만이었다. 이제 고통은 끝난 줄 알았는데 ‘근로정신대’ 후유증은 망령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귀국 후에 학교나 군청에서 찾아와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저는 혹시 자료로 쓰일까 해서 일본으로 떠나는 날부터 도착하는 날까지 일기에 써뒀거든요. 그러곤 동네 사람들은 절 보면 ‘돈 많이 벌어왔느냐’ 물으며 실실 웃기만 해요. 나이가 차서 혼담이 들어오는데 절 보고선 맘에 든다며 ‘혼인날을 잡자’던 이들이 연락이 없어요. 알고 보니 제가 군 위안부 출신으로 알려진 거예요.”
할머니는 스물한 살 때 건축일을 하는 남자와 서둘러 결혼했다. 아들 둘을 낳고 살던 어느날, 술에 취한 남편이 “일본말 잘하는 게 다 이유가 있었다. 일본인을 몇이나 상대했느냐”고 화를 내더니 집을 나갔다. 그러곤 10년쯤 지난 후 병에 걸려 아들 셋까지 데리고 돌아왔다. 병에 걸려 일을 못하자 새 아내가 도망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애들 아버지라 함께 살았다. 막내딸을 낳은 지 2년 뒤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그후 6명의 자식과 친정어머니, 큰언니네 조카들까지 11명의 생계를 책임졌다. 어린 딸을 등에 업고 옛 광주역 앞에서 리어카 행상을 했다. 참기름부터 생선까지 팔아보지 않은 물건이 없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도, 동네에서 제사 지내고 밖에 놔둔 제삿밥까지 가져다 먹여도, 11명의 배를 채우기는 힘들었다. 광주시에서 ‘훌륭한 어머니상’을 주기도 했지만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타고난 성실성과 긍정적인 생각으로 기다렸다.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라는데 설마 어린 소녀들 임금을 착취할까 생각했다. 미쓰비시에서 고향으로 임금을 보내준다는 약속을 믿었다. 50년이 지난 99년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앞서 86년부터 미쓰비시중공업 공장이 있던 나고야의 양심적 시민들이 문제 해결에 나선 게 도움이 됐다. 하지만 10년 만인 지난해 일본에서 들려온 소식에 억장이 무너졌다.
“일본 정부에 후생연금 탈퇴수당 지급을 청구했는데, 근로기록을 찾는다며 10년을 질질 끌더니 ‘44년 10월부터 11개월만 후생연금에 가입한 사실이 인정된다’면서 탈퇴수당으로 99엔을 산정한 거예요. 당시 황소 한 마리 값이 50엔 정도였으니, 황소 두 마리가 요즘 라면 한 봉지 값으로 변한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일본에 가 후생성 차관 앞에서 99엔 동전을 던지며 ‘마트에 가보니 이 돈으론 껌밖에 살 게 없더라. 이 돈으로 당신 자식들에겐 뭘 사줄 수 있느냐’고 따졌죠.
더욱 서운한 것은 한국 정부의 무관심과 냉담한 시선이었다. 팔순 노인들이 10년간 일본을 오가며 재판하고 엄동설한이나 삼복더위에 시위를 해도 정치권은 물론 자치단체에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광주 시민들이 힘이 되어줬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을 만들어 10년을 기다려줬고, 덕분에 미쓰비시로부터 ‘협의체를 구성해 해결하겠다’는 성과를 얻어냈다. “모두 시민들 덕분이에요. 저는 시민의 힘을 믿습니다. 그래서 광주항쟁 때는 이웃 어머니들과 함께 도시락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나눠주기도 했고 5년 전부터는 동네 노인정에서 밥짓기 자원봉사를 해요. 요즘 거리에 가면 시민들이 힘내라고 격려도 해주고 영양제도 사줍니다. 얼마나 보상받을지 모르지만, 저를 도와준 시민단체 분들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저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도 돕고 싶어요.”
비가 새고 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조그만 집에 50년째 살면서도 할머니는 요즘 행복하다. 그는 이제 유명인사가 되어 금호타이어 같은 기업체나 단체에 강의도 다닌다. “요즘 왜 그리 자살하는 이들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너무 유약하고 쉽게 좌절하는 것 같아요. 강의하러 가서는 ‘저는 죽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너무 억울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겠더라. 전 66년을 기다려서 보상을 받는데 여러분이 몇 년도 못 기다리면 안된다’고 희망과 인내의 힘을 강조합니다. 다들 희망을 가지세요.”
일제 강점기 일본 기업의 강제 노무동원은 확인된 것만 6만3500여명에 이른다. 당시 조선인을 노역에 동원했던 기업장은 모두 2600여곳에 달한다. 하지만 일본 기업 중 어느 한 곳도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도 없었다. 지난 14일 미쓰비시가 근로정신대 손해배상 문제에 대해 재협상에 나설 뜻을 밝힌 것은 일본 기업 중 최초여서 의미가 크다.
‘조선여자 근로정신대’는 1944년 일본이 군용 경비행기를 제작하던 나고야의 미쓰비시 군수공장에서 강제노동을 시킨 조선인 소녀들을 뜻한다. 소녀들은 하루 10시간씩 강제노동을 하고도 단 한 푼의 급여도 받지 못했다. 회사 측은 ‘급여는 저축했다가 나중에 조선에 돌아갈 때 지급하겠다’고 했지만 이 약속은 아직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근로정신대 문제가 공론화된 것은 일본의 양심적 시민 1000여명으로 구성된 근로정신대 피해자 소송지원단 덕분이다. 88년 나고야 시민 몇몇이 강제노동하다 도난카이 지진으로 숨진 조선인 소녀 6명에 대한 위령비를 세웠다. 당시 기숙사 사감의 아들이 이 기사를 보고 보관 중인 사진첩을 공개한 뒤 본격적인 지원단을 결성하고 근로정신대의 실체 알리기에 나섰다. 10여년이 흐른 99년 양금덕 할머니 등 피해자 8명은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뜻있는 일본 시민들과 함께였다. 2005년 3월 나고야 지방재판소, 2007년 나고야 고등재판소, 2008년 11월 도쿄 최고재판소에서 모두 기각판결을 받았지만 근로정신대 피해자 소송지원회는 11년 동안 한결같이 원고들을 도왔다. 일본 내각과 미쓰비시, 의원회관 등을 찾아가 성토하고 지난달 18일에는 일제 강점 상황과 관련한 일본 내 진상규명 네트워크도 결성했다.
지난해 3월 이국언씨(42) 주도로 광주에서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만들어졌다. 2004년부터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이씨는 나고야 시민들이 99년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직장도 그만두고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그리고 광주지역 후원자들과 시민모임을 결성했다. 시민모임은 1인시위와 소송지원회 회원 초청 등 광주-나고야 간 평화의 길을 개척했다. 이씨는 “우리 정부는 4조원대에 이르는 징용피해자들의 미지불 임금이 일본에서 잠자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면서 “그러나 기업의 손해배상 이전에 일본 정부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 1000여 명이 경술국치 100년을 앞두고 28일 한·일 강제병합은 무효라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일본 정부에 제출했다.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가 일제의 한국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하는 내용의 ‘간 담화’를 발표하라는 요청서도 함께 전달했다.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양국 지식인 공동성명 사업을 추진해온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는 이날 도쿄 참의원 의원회관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병합조약이 원천무효라는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 성명에 서명한 인사가 1000명을 넘어 오늘 총리담화를 발표하라는 요청서와 함께 아라이 사토시(荒井聰) 국가전략상과 민주당의 반노 유타카(伴野豊) 국제국장을 통해 간 총리에게 제출했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는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 이바라키대 명예교수 등 일본 측 발기인과 한국의 김영호 유한대 총장,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김진현 전 서울시립대 총장 등이 함께했다. 성명에 동참한 지식인은 지금까지 한국에서 587명, 일본에서 531명 등 총 1118명이다. 서명자 중에는 일본 최고의 추리소설가인 아카가와 지로(赤川次郎)가 포함돼 있다.
일 정부에 제출한 ‘강한 아시아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요청서’는 “일 정부가 한국 병합조약이 원천무효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김영호 유한대 총장은 “한국과 일본의 조선사 전공 학자 228명이 서명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며 “중국의 일본사학회가 지지성명을 보내왔다”고 소개했다.
앞서 5월 10일 일본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와 한국의 김지하 시인 등 양국 지식인 200명이 각각 서울과 도쿄에서 “한국 병합은 불의부정한 행위였으며, 한국 병합조약 역시 모두 거짓”이라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100년 전 한·일 강제병합 무효 인정하라” July 29, 2010 Over 1,000 scholars, writers and attorneys from Korea and Japan asked the Japanese government for a formal apology for the annexation of Korea ahead of its 100-year anniversary next month.
They also asked Japan to declare the annexation treaty, signed Aug. 29, 1910, null and void, which would essentially admit the annexation was wrong.
“With over 1,000 signatures from scholars in both South Korea and Japan saying that the annexation treaty is invalid, we sent a formal statement to the Japanese prime minister today to request a formal apology for the colonization,” said Haruki Wada, emeritus professor at the University of Tokyo and authority on Korea’s modern history, at a press conference in Tokyo yesterday.
“The annexation of Korea itself was an injustice,” said Wada. “The Japanese government should change their interpretation of what happened and say that the treaty was invalid. We should be able to solve the historical conflicts between Korea and Japan through mutual cooperation.”
In May, a group of roughly 200 scholars from Korea and Japan issued a joint declaration saying that Japan’s annexation of Korea was null and void. Yesterday’s request by a much larger group could have more impact in Tokyo.
“The statement has great meaning in that it requested a specific action from the prime minister,” said Yi Tae-jin, emeritus professor of Korean history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who is one of the signatories on the request.
Japanese Prime Minister Kan Naoto’s cabinet secretary said last month that an apology was being considered.
일본 지바(千葉)현 야치요(八千代)시는 자위대 나라시노(習志野)부대가 있다. 1923년 9월 1일의 ‘관동 대지진’ 당시 한국인들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모아 놓은 수용소가 있던 곳이다. 당시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3천여 명의 한국인이 수용됐다가 일부가 살해당했다. 그리고 실제로 불이 난 곳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이 방화했다는 소문이 나 돌아 시민들에 의해 6명의 한인들이 처형됐던 곳이다. 이들은 들판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 쳐졌다.
▲법현스님외 7명이 벌인 범패 영산재 공연(조선일보)
근처의 관음사(觀音寺)에서는 이들을 불쌍히 여겨 오랫동안 공양을 했었다, 이를 알게 된 한국측에서는 지난 1985년 단청을 입힌 ‘보화종루’와 괘종을 만들어 기증하였다. 사건발생 80년 후 2003년 8월 31일 무더운 날씨 속에 보화종루에서는 종소리가 수십 번
울려 퍼지며 관동대지진 80주년 위령제가 열렸다. 법현스님 외 7명의 범패 공연, 김유 감씨를 비롯한 19명의 새남굿, 이애주(李愛珠) 서울대교수의 진혼무 등 공연이 이어졌다. 무려 세 팀의 인간문화재가 참여한 위령제였다. 이 위령제는 대지진 발생 당시 일본정부에 의거 이국 땅에서 억울하게 학살당하여 불귀의 객이 된 2만여 명의 한국인 원혼을 달래는 추모 위령제였다.
이 절의 세끼 고센(關光禪)주지는 “당시 희생된 사람들을 오랫동안 공양해 왔지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세끼(關) 집안이 주지를 계승해 현 주지스님인 세끼 고센(關光禪)은 25대째이다.
1985년 종을 만들 때 건립문에 “오늘의 한국인은 어두운 역사를 미워하고 슬퍼할지언정 오늘의 일본, 일본인을 꾸짖고 싶지 않다”라고 적었다.
◆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들었다 1954년 관음사의 주지가 된 세끼주지는 관동대지진을 직접 경험은 하지 않았으나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당시 이 부근에는 포로 수용소가 있어 러일전쟁시의 소련인 포로, 청일전쟁의 중국인 포로가 수용되어 있었지요.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고 곧 유언비어가 퍼졌대요. 유언비어 내용은 「조선인이 민가에 방화를 했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화재를 당한 사람은 없었지요.” “많은 조선인이 끌려갔고 9월 5일경 군으로부터 조선인을 데려가라는 명령이 내려졌어요. 그래서 부근의 다까즈(高津) 농민들은 조선인을 인수하러 가야만 했어요. 이 절에서 300m 떨어진 곳에 나기노하라(ナギの原)라는 공유지가 있는데, 농민들은 관청에서 조선인의 손을 뒤로 묶은 채 데려와서 나기노하라에서 눈을 감기고 일본칼로 베어 그곳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어요.”
“나기노하라에서의 공양은 1959년경부터 선대에 의해 시작되었지요. 어느 날 마을에 살던 노인이 절에 찾아와서 조선인 학살자들의 공양을 하고 싶다고 해서 위령푯말을 세우고 매년 9월 학살된 장소에서 위령제를 올리게 되었어요. 전쟁이라면 몰라도 관동대지진은 전쟁도 아닌 당시 정부의 모략으로 조선인을 학살한 것이에요. 공포의 시대·군국주의의 악업의 하나라고 할 수 있어요.”
1973년 관동대지진 50주년을 기념하여 치바현 내 각지에서도 조사가 행해지게 되었다. 이 성과를 자치체 문화연구소 후나바시(船橋)지소가 자료집 1집 『관동대지진과 조선인-후나바시시와 그 주변』을 정리했다. 1978년 6월 「치바현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 조사실행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실행위원회는 군대내부의 증언을 중심으로 자료집 제2집 『관동대지진과 조선인-나라시노(習志野) 기병연대와 그 주변』을 발행했다. 1983년 실행위원회가 『いわれなく殺された人人』를 아오키(靑木) 서점에서 발행, 그 후 9월 10일에는 관음사, 다까즈구, 실행위원회가 주최하는 위령제가 열리게 되었다.
◆ 유해발굴에서 관음사 안치까지 주지스님은 “발굴 공양은 구민(區民)이 회합을 열어 구민 전체 의견으로 실현되었어요. 오랜 시간이 흘러 희생자에게 죄송하나, 마침내 염원하던 발굴이 실현되어 다행이에요. 1998년 9월 24일 오전 8시 탈령식(脫靈式)에 이어 발굴 작업을 시작했어요. 증언을 토대로 나기노하라를 굴착기로 작업, 12시 15분경 유골이 나왔고, 저녁 5시경에는 발굴이 종료되었어요. 유골은 정성껏 물로 씻어 일단 관음사 납골당에 안치한 후, 화장을 하려고 야치요시에 접수했으나 유골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 당하는 등 곡절을 겪었지만, 화장을 끝내고 3개의 항아리에 담아 관음사로 옮겨 왔어요.”
1999년 9월에는 고즈지구 특별위원회와 추도조사실행위원회, 관음사의 합의 하에 위령비도 완성되었다. " 현재 위령비 밑에는 희생된 조선인 6명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학살의 모든 책임은 일본에 있으면서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부측에 의한 사죄도 행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뜻 있는 주지스님의 배려로 관동대지진의 희생자들은 관음사에서 그 영혼을 위로 받고 있다. “사건은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지만, 일본인으로서 면목이 없어요. 참으로 야만적인 일을 했다고 생각해요. 두 번 다시 이러한 참극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사실을 정확히 널리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일본 전국에는 학살당한 한국인을 달래는 위령비가 14~15곳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치바현 야치요시의 관음사는 관동대지진의 비참한 역사를 증명하는 하나의 사적지가 되었다.
◆ 범종과 종루 건립 1985년에는 관음사 경내에 한국인 기부에 의한 범종과 종루가 설치되었다. 현대극장 대표인 김의경씨가 관음사의 위령제 이야기를 듣고 "대지진의 희생자에게 음지에서 이 같은 위령제를 지내 주어서 감사하다”라고 표하고 범종과 종루를 기증하게 되었다. 주지 스님은 "고국에서 만들어진 종을 치면 희생자인 죽은 자들의 영혼도 위로를 받을 수 있고, 가해자인 일본인들에게도 당시를 뒤돌아보며 반성시키는 데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여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1986년에는 한국불교회에 의한 위령탑 건립도 있었다.
◀관음사 경내 보화종루(普化鐘樓)(한국인과 일본인이 모두 평등하게 살라는 뜻)와 범종(보신각종의 1백분의 1 크기로 축소한 것). 한국인 현대극단 김의경 대표에 의해 기증되었다.
구(舊) 일본 육군의 비밀병기연구소인 '노보리토(登戶)일본군연구소'가 '메이지대학 평화교육 노보리토 연구소 자료관'으로 7일 거듭 태어난다.
메이지대측은 가나가와(神奈川)현 가와사키(川崎)시 메이지대 이쿠다(生田) 캠퍼스 안에 자리 잡은 이 연구소의 전모를 일반인 공개를 하루 앞둔 6일 연합뉴스에 소개했다.
노보리토연구소는 한창때에는 100여 동의 건물에 1천명 이상이 근무한 대규모 연구 기관이었다.
1939년 설립됐고 4개 과로 나뉘어 전파병기와 생물.화학병기 개발, 위조지폐 인쇄 등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소이탄을 매단 풍선 폭탄을 미국 본토에 띄워 보내 공원에서 쉬고 있던 가족 등 민간인을 죽인 적도 있고 중국의 벼나 보리를 몰살하고 미국의 소를 대량 살상하려고 세균무기를 개발했는가 하면 요인 암살용 독약 무기도 개발했다.
노보리토일본군연구소자료관에 전시될 구 일본 육군의 생물.화학무기 개발 관련 자료(도쿄=연합뉴스)
또 중국 경제를 교란하려고 위조지폐를 찍어낸 일도 있었고 인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만주 731부대와 인적 교류를 하는 등 온갖 추악한 일을 자행했다.
일본은 패전과 함께 연구소 관련 자료를 모두 서둘러 폐기했고 1951년 연구소 터 일부에 메이지대학 이쿠다 캠퍼스가 들어서면서 노보리토 연구소의 존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다.
오랜 시간 베일에 가려져 있던 연구소의 실체를 밝혀낸 것은 이 지역의 학생과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1980년대 말부터 과거 연구소 요직에 있던 생존자들을 직접 만나 증언을 듣고 현장을 누비며 자료를 수집해 노보리토연구소의 가공할만한 실체를 복원했다.
이후 이들은 '노보리토 연구소 보존을 위한 시민회'를 조직, 메이지대와 함께 자료관 건립을 추진한 끝에 드디어 결실을 보았다.
비밀병기 개발 연구소의 실체를 공개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라는 게 메이지대학 측의 설명이다.
옛 일본군의 연구시설을 복원한 자료관은 일본 내에서도 최초다.
약 360㎡ 넓이의 자료관에는 일본군이 미국 본토로 띄워 보낸 풍선 폭탄 모형과 각종 생물.화학병기 개발 도구, 중국 경제를 교란하려고 찍어낸 위조지폐 등 일본의 부끄러운 과거의 흔적이 고스란히 전시돼 있다.
노보리토일본군연구소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 경제를 교란하기 위해 제작한 중국 위조 지폐. (도쿄=연합뉴스)
자료관 운영을 총괄하는 메이지대 야마다 아키라(山田朗) 문학부 교수는 "노보리토 연구소에서 개발된 병기 중에는 인도적 문제나 국제법상의 문제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도 많았다"며 "그러나 전쟁의 어두운 측면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일본군이 저지른 잔혹한 행위를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료관을 설립했다"라고 말했다.
중국은 '일본이 중국의 만주철도부설권과 맞바꾼 간도협약'은 마치 '중국이 자국의 이익을 빌미로 일본에게 장물인 간도를 불법적으로 취득한 행위'이니 역사왜곡 동국공정 그만두고 불법점유하고 있는 간도를 즉시 한국으로 반환하라.... 日本製品 不買運動 / 해방 후 1948년에 주장하였으나 미국에 의해 무산된 대마도의 한국령을 선포하는 계기로 삼아야.... / 日독도영유권 주장은 "제2의 침략과 탈취행위" / 独島は日本の領土? 日本は大韓民国の領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