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8월 18일, 대한민국이 건국한 지 3일 뒤 이승만 건국 대통령은 첫 기자회견을
열고 대일 관계에 관해 중대한 발언을 한다.
"우리는 일본에 대마도를 한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대마도는 上島及下島(상도와 하도)의 二島(두 섬)로 되어 한일 양국의 중간에 위치한 우리 영토인데 삼백 오십년 전 일본이 불법으로 탈취해 간 것이다."
이 대통령의 이 같은 '대마도 한국 영유권' 발언에 당시 일본 요시다 시게루 내각이 반발하자 이 대통령은 9월 9일엔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 영유권을 확인했다고 뉴데일 리가 보도했다.
뉴데일리에 따르면 다음해인 1949년 1월 8일 연두 회견에서 이 대통령은 다시 한 번 대마도 반환문제를 강력히 제기한다.
이 대통령은 회견에서 "대일 배상문제는 임진왜란 시부터 기산하여야 한다"며 "특히 대마도는 별개로 하여 취급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대마도가 우리 섬이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350년 전 일본인들이 그 섬에 침입하여 왔고 도민들을 민병을 일으켜 일본인과 싸웠다"며 "그 역사적 증거는 도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마도 여러 곳에 건립했던 비석을 일본인들이 뽑아다가 도쿄박물관에 갖다 둔 것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은 "이 비석도 찾아올 생각이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은 1949년 12월 31일 대통령 연말기자회견에서 거듭 "대마도는 우리의 실지를 회복하는 것이다. 대마도 문제는 대일 강화회의 석상에서 해결할 수 있으며, 일본이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역사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라고 강력히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이 같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는 약탈 문화재 반환 요구와 함께 한일회담 협상과 맞물리면서 60여 차례나 이어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보도된 국내외 기사들을 살펴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으로부터의 대마도를 반환받는 것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
함께 중국 여론도 이 같은 주장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중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이를 지원하는 대규모 시위를 했던 사실 역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어떤 근거로 대마도가 한국 땅이고 해방-건국과 함께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아야 할 실지(失地)라고 주장할 수 있었을까?
김상훈 대령(육군사관학교 군사훈련처장)은 2008년 미국 조지 워싱턴대에 정책 연수를 위해 1년간 머물렀다. 조지 워싱턴대는 이승만 대통령이 학부를 마친 곳. 건국대통령에 대한 관심을 갖고 조지 워싱턴대에서 1907년 청년 이승만의 흔적을 찾던 김 대령은 우연히 조지워싱턴대 도서관에서 이승만의 영문 저서 'Japan Inside Out'을 발견하고 탐독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책의 내용 중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오래된 명확한 해상경계가 있다'라는 이 대통령의 언급을 발견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나라가 시끄럽던 시절, 김 대령은 이 '한-일 간의 오래 된 명확한 해상경계'가 어디를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승만이 건국대통령에 오른 뒤 기회만 주어지면 "대마도를 불법 점거한 일본은 즉각 반환해야 한다"고 수십 차례나 주장한 그 근거는 무엇인지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수 년 간의 집요한 연구와 추적 끝에 김 대령은 이승만의 '대마도가 한국 영토'라는 주장의 명백한 근거를 찾았다. 그리고 왜 일본이 틈만 나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이유도 밝혀냈다.
김 대령은 11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리는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의 제3회 '이승만 포럼'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이 같은 주장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그 명쾌한 근거를 제시한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8세기 중엽의 정상기(鄭尙驥)가 제작한 동국지도 (경상도)를 보면 일본 땅으로 알고 있는 대마도(對馬島)가 경상도의 영역과 함께 그려져 있다. 18세기 중엽의 정상기(鄭尙驥)가 동국지도를 제작할 당시에는 조선의 땅이었기에 경상도 땅을 그리면서 넣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현존하는 동양최고의 고지도인 혼일강리도는 1402년 익원공이 좌의정으로 있을 때 우의정 이무와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고 일본의 류코쿠(龍谷)대학이 소장하고 있다. 이 혼일강리도를 보면 우리의 영토에 대마도를 포함하고 있다.
요람집 경상도 편에도 대마도를 포함하여 지도를 제작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16세기말 목판본으로 제작된 지도(경상도)에서도 대마도가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규장각에서 보존하고 있는 1683년에 제작된 팔도총도에서도 역시 대마도를 우리 땅과 함께 그려두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907년에 현성운이 동판본으로 제작한 대한신지지(대한전도)에는 동해를 ‘대한해’라고 기록하고 대마도와 일본 쿠슈(九州)의 해협을 ‘대마해협’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대마도는 우리나라 땅임을 알리기 위해 그렇게 명확히 기록한 것은 아닐까? 만약 대마도가 일본 땅이라면 ‘대마해협’이라고 표기하기 보다는 ‘쿠슈해협’이라 표기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 아닐까?
이처럼 다양한 지도들이 하나 같이 대마도를 우리 땅과 함께 그려두었다는 것은 대마도가 우리나라의 영토에 속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려 넣은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대판만(大阪灣)에는 담로(擔魯)와 일치하는 담로도(淡魯島)가 있었다. 일본열도 내에 한국어 계통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A.D 18년에 공주(熊津)에 도읍한 비류 백제는 처음부터 백가가 되는 많은 세력이 바다를 건너왔다.(初以百家濟海)."
『일본국가의 기원』 규슈(九州)에는 7개의 담로(對馬, 壹岐, 伊都奴, 投馬, 邪馬臺)가 있었다(井上光貞). 서기 100년경에 이미 규슈지역의 키 작은 원주왜인(原住倭人: 고고학상의 키작은 남방계 단신인)을 정복하고 비류백제 왕실의 자제(子第)『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가 담로주(擔魯主)로 통치하고 있었다.(『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 이 때문에 담로가 많이 있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신대성기(神代成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음신과 양신이 성교하여 부부가 된 이후 산월(産月)에 이르러 이들 담로주(淡路州)를 모태(母胎)로 대일본을 낳았다(陰陽始, 合爲夫婦, 反至産時, 先以淡路洲爲胞… 生日本)."(金聖昊, 恩師 韓國편) 이상의 내용은 백제인이 세운 담로가 일본 혼슈(本州)는 물론 규슈연안과 대마, 일기도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한단고기』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記)에 의하면, "먼 옛날 마한(馬韓) 지역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이 대마도·일기도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 지역은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고 한다. 이때 소잔명존은 아들 오십맹신을 데리고 신라국(규슈 내에 있는 拷衾新羅: 신라소국)에 내려서 소시모리라는 곳에 있었다. 그리고 "이 땅은 내가 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며 진흙으로 배를 만들어 동쪽으로 가 이즈모(出雲)의 파천상류에 있는 조상봉으로 갔다(『일본서기』신대 상8단).
위의 신라국은『일본서기』중애천황 8년 9월조에 나오는 고금신라 및 출운풍토기의 국인신화(國引神話)의 고금신라와 같은 곳으로, 규슈에는 도래인이 세운 신라소국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소잔명존이 일본의 이즈모로 이주한 것은 옛날 왕검조선 때 대마도·일기도와 규슈 등이 마한의 관경 속에 속하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서술한 내용들은 대마도를 중심으로 한 일기도와 규슈지방이 왕검조선 때부터 우리 민족이 이주하여 통치했다는 실증적 자료다. 『일본서기』에 쓰여 있는 신(神)은 그 모두가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지배인들을 칭한다는 것은 『일본서기』의 내용을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섬야노(陝野奴)를 우두천왕(스사노오)으로 모신 신사(神祠)를 우두사(寺: 소머리데라)라고 부른다.
2. 예로부터 규슈와 대마도는 곧 삼한(三韓)에서 나누어 다스린 땅으로 본래 왜인이 사는 지역이 아니었으며, 임나(任那)가 또 나뉘어 삼가라가 되었는데, 소위 가라란 그 지방에서 중심되는 마을을 일컫는다(좌호가라는 신라, 인위가라는 고려, 계지가라는 백제이다: 『한단고기』고구려편)(이병선 저 『임나국과대마도』, 문정찬 저『일본상고사』).
3. 임나는 대마도에 있었던 우리나라의 명칭이며, 동과 서에 마을들이 있어 치소(治所)가 있고 조공하기도 하며 배반하기도 하였는데, 그 후 대마도섬이 드디어 임나에 지배되었으므로 그때부터 모두 임나를 대마라고 일컬었다(東西各有墟落 或貢或叛 後 對馬二島 遂爲任那所制故 自是任那 乃對馬全稱也: 『한단고기』고구려편)(이병선 저『임나국과 대마도』, 문정찬 저 『일본상고사』등)
4.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어름에 있었는데 북쪽은 바다로 막히고 국미성에 치소가 있었다.(任那者 本在對馬島西北界 北阻海有治曰 國尾城:『한단고기』고구려편)(『일본서기』, 이병선 저『임나대마도』, 문정찬 저『일본상고사』).
5. 영락 10년에 세 가라(대마도)가 모두 고구려에 구속되었고 이로부터 바다와 육지의 모든 왜가 임나에 통합되어 열 나라로 나뉘어 다스리니 이름하여 연정(聯政)이라 하였다.(400∼479년)(永樂十年 三加羅盡歸我 自是 海陸諸海悉統於任那 分治十國 號爲聯政)(『한단고기』고구려편, 〈광개토대왕비문〉, 이병선 저『임나국과 대마도』)
6. 이들 연정(대마도·일기도·말로국·규슈·세도연안·야마토왜)은 고구려에 직할되어 열제(광개토대왕)의 명령 없이는 제멋대로 행할 수 없었다(400∼479년). 그 후엔 백제가 관할하였다(然 直轄於高句麗 非烈帝所命 不得自專也)(『한단고기』고구려편 열제의 비문내용)
7. 가락국기편: 가락국 6대 좌지왕 2년(408년) 왕비 용녀(傭女)가 붕당을 일으키어 국력이 쇠잔할 때 고구려 연정(대마왜)이 지배하였다(신라 실성왕7년, 동진 安義熙 3년, 일본 皇反正 3년).(〈광개토대왕비문〉, 인터넷 대마도 사료)
8.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 실성왕7년조 왜가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가락국과 신라는 같이 근심하였다. 대마도를 정벌하려 하는데 미사품(未斯品)의 간언으로 중단했다.『삼국사기』의 본조(本條)에도 임나국은 가락의 영토(任那國之所係 赤各羅古城所係)라 했다. 이 때 대마왜는 임나연정의 고구려 지배하에 있었다.
9. 대마도는 가락국의 영토로서(『삼국사기』『가락국기』『대동세보』), 비단무역의 거점으로 용성국(나가사키)→오키나와→리만 해류를 타고 싱가포르→중국 복강성→갠지스 강→아유타국→아라비아 대상이 비단을 나른 곳이었다.(14년의 실제 탐방으로 엮어낸 이용기 저서『가락국의 영광』).
10. '아메노 히보코' 설화는 당시의 한국세력이 대마도를 거쳐 일본열도에서 땅을 개척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일본왕정에서 번영하게 된 경위 등을 진실하게 쓰고 있다.(일본의 『고사기(古事記)』).
11. 『위지동이전(魏璡夷傳)』왜인전의 3세기 대마도 모습의 기록은 대마도가 대마국(對馬國)으로 표기되어 있고,『한단고기』고구려편에는 혼슈·규슈·대마도에는 본래의 왜인이 없다고 기술되어 있으므로 그곳 주민들은 곧 우리 나라 도래인(度來人)을 뜻한다.
12. 우리 나라『삼국사기』에는 대마도라 기록되어 있으며,『일본서기』에는 대마국·대마도·대마주 등으로 쓰여 있다. 한자의 음을 빌린 대마란 이름이 중국의 『삼국지』이래로 널리 쓰여졌다. 대마란 마한(馬韓)과 마주 대한다 하여 부른 이름이다. 대마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나가도메 히사이의 저서『고대 일본과 대마』에 나와 있다.
13. 일본의『고사기』에는 '진도(津島)로 나와 있고『일본서기』의 신대(神代)에는 '한향지도(韓鄕之島)'로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대마도 이름의 뜻과 관련된 것으로서 '쓰시마(津島)'는 한반도로 가는 배가 머무는 항구와 같은 섬이고, '가라시마(韓鄕之島)'는 바로 한국인의 섬으로서 한국사람이 고대로부터 사는 섬 또는 한반도로부터 사람과 문화가 건너올 때 거쳐온 섬, 교역이 이루어졌던 섬으로도 표현된다.
14. 한국영토의 남쪽 구야한국(拘邪韓國:加那)에서 바다를 건너면 대마국에 이른다. 그곳의 대관(大官)을 '히고(卑拘)'라 하고 부관을 '히노모리(卑奴母難)'라고 불렀다는 대목의 '대막국도(對馬國島)'가 있는데 이것이 최초의 쓰시마(對馬) 기록이다. 또 『위지(魏志)』의 편집자는 '津의 島'라는 의미로 이해했을 것이다. 즉 쓰(津)는 배가 닿는 곳이며, 따라서 배가 닿는 섬이란 뜻으로 쓰시마(津島)로 표기해야 옳았고,『고사기(古事記)』에도 쓰시마로 되어 있다. 또 하나 유력한 설은 한국어의 해설이다. 일본어의 시마(島)는 한국어의 '섬'에서 유래된 말로서 한국말의 두 섬이 두시마, 쓰시마로 되었다는 설이 있다. 위의 내용들은 놓고 볼 때 3세기 이전부터 대마도가 바로 구야한국(가야)에 속했다는 것이『삼국사기』실성왕 7년편과『가락국기』6대 좌지왕 2년의 기록 및 『대동세보』에 수록되어 있다.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 제3, 실성왕 7년조 "春二月 王聞 倭人於對馬島置營貯以兵革資粮以謀襲我 我欲先其未撥揀精兵聲破 兵儲舒邯未斯品曰, 臣聞兵器戰危事…." 편년『가락국기』실성왕 7년편 "神王二年 戊申新羅實聖王 七年 西紀四0八年 倭始置營于 馬島 神王戊申 倭始營於對馬島 洛羅二邦爲憂…." 『대동연보』좌지왕편 "新羅實聖王七年 東晉安帝熙四年 日本皇反正三年 倭始營于 對馬島…." 이러한 역사적 고증을 통해 볼 때 5세기 이전에 대마도는 오랫동안 바로 가야의 영토이었음이 밝혀졌다. 즉 일본의 영토가 아님을 일본인 스스로 증명하는 대목이다.
15. 일본사학자 나가도메 히사이의 저서『대마도 역사관광』에 나타난 대마도의 소도(卒土)는 마한의 소도(蘇塗)와 같은 것이며, 다카무스 비노미코도와 데라시스 오오미카미(天照大御神) 등의 각종 신화가 조선분국의 존재를 증명한다. 다시 말해 대마도신의 고향은 바로 한국이다(나가도메 히사이 저, 『대마도 역사관광』).
16. 영락 10년(410)에 세가라 (대마도 三韓分國: 左護·仁位·鷄知)는 모두 고구려에 귀속되고 이로부터 바다와 육지의 모든 왜가 임나(任那)에 통합되어 열 나라로 나누어 다스리니 이름하여 임나연정(任那聯政)이라 하였다.(『태백일사』고구려편)(이병선 저『임나대마도』, 문정찬 저『일본상고사』,『일본서기』5 王代,〈광개토대왕비문〉).
17. 구야한국(금관가야)에서 1천여 리 떨어지 바닷길을 한 차례 건너서 대마국에 이르니 사방이 400여 리쯤 외었고 그곳에 조선 도래인이 주거하고 있었다(위지 왜인전,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
18. 대마도에서 1천여 리 떨어진 바닷길을 한 차례 건너서 일기국(壹岐國)에 이르니 사방이 300리쯤 되었다. 본래 이곳은 사이기국(斯爾岐國)인데 자다(子多)의 여러 섬 사람들이 모두 조공하였다(대마도의 治所를 중심으로 한 조선분국임)(조선분국 주장설은 김형석·조희승 저『일본에서의 조선분국』,『한단고기』대진국편).
19.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한국침략을 위하여 왜를 두둔하고 끌어들이는 입장이다.『한서』,『위서』,『신·구당서』,『진서(普書)』,『송서(宋書)』등이 그것이다.
중국 사서(史書: 宋書, 梁書, 南史) 등의 5세기에 실린 일본기사 가운데서 왜·신라·임나·가라·진한(秦韓)·모한(慕韓) 등의 사지절도독(使持節都督: 정권을 위임받은 총독)의 칭호를 받았으므로, 역대 일본학자들은 이때 일본정권이 바다 건너 한국 남부를 경영하였다는 증거로 삼아 이 부분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러나 이 같은 내용들은 일본왕실의 일방적인 가필이며, 그 당시에는 일본열도 내에서는 통일왕정은 없었으므로(통일왕정은 7세기 후반임), 도래한 한국소국 중에 대마도를 근거한 임나연정왕의 증거임이 이미 드러났다(〈광개토대왕비문〉: 왕 10년(400~479)후에 대마도에 임나연정이 수립되었고, 5왕(찬·진·제·흥·무)은 곧 대마도의 임정왕을 칭함)(김석형·조희성 저『일본에서의 조선분국』, 이병선 저『임나국과 대마도』).
20. 아라(安羅)는 대마도의 임나(任那)로 편입되고 고구려와 더불어 이전부터 화친을 맺었다. 말로국(末盧國)의 남쪽은 대우국(大隅國)이라 하는데 그곳에 시라군(始羅郡)이 있었으며, 본래 우리 나라 남옥저 사람들이 도래하여 살았던 장소이다(태백일사 대진국편, 김석형·조희성 저『일본에서의 조선분국』,〈광개토대왕비문〉).
21. 신라가 통일한 후 8세기(779년)에 국교가 단절되자 일본은 군사적 및 무역의 요충지인 대마도를 침거하여 조선약탈의 기지로 삼았으나, 신라는 통일전과 같이 계속하여 왜구를 소탕하였으며 대마도를 관리해 왔다. 특히 9세기 초 이후 장보고의 해상활동과 신라의 적극적인 정치적 개입이 있었고, 일부 남아있는 기록에 의하면 811년, 812년, 813년, 814년경에 대마도에 관리를 파견하고 회사품을 하달한 내용이 있다(나종우 저,『중세의 대일관계』중 고려 전기내용 참조, 원광대학교출판부, 1996).
22. 대마도의 등정방(藤定房)이 1723년에 편찬한『대주편년략(對州編年略)』3권으로 구성된 산가요약기(山家要略記에는 "대마도는 고려국의 행정치소인 목(牧)이었다. 옛날에 신라사람들이 이곳에 살았고, 중애천황(신공황후 섭정)이 대마도 악포(鰐浦)에서 신라를 정벌함으로써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지적한 신라는 대마도에 있는 좌호가라(佐護加羅) 중심의 신라이며, 중애천황 8년(199년)9월조에는 천황이 신라정토의 신탁을 믿지 않고 억지로 웅습(熊襲)을 토(討)하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을 남겼다(이병선 저『임나대마도』,『일본서기』,『한단고기』고구려편).
23. 고려시대에는 만호(萬戶)라는 관리를 파견하여 대마도를 관리하였고, 진봉선 무역(進奉船貿易: 왜와 대마도가 진상해오면 회사품으로 답하여 많은 생필품을 보냄)을 하였다. 그리고 우왕3년(1375)에는 박위를 보내어 대마도의 섬주민을 보호하고 왜구를 격퇴했다. 이것은 대마도가 고대로부터 우리 영토임을 재확인한 과정이다(나종우 저『중세의 대일관계』, 원광대학교 출판부, 1996).
24. 가마쿠라 막부시대 중기(13세기 말0에 만들어진『진대(塵垈)』11권의 사서(辭書)로서 저자 불명의 권2에 의하면 "무릇 대마도는 옛날에는 신라국과 같은 곳이다. 사람의 모습도, 그곳에 나는 토산물도, 있는 것 모두가 바로 신라의 것이다"로 되어 있다. 이것은 옛날부터 대마도에 신라사람들이 대를 이어 살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대마도가 신라와 같은 곳임을(左護加羅: 신라)증명하며, 인종적·문화적으로 동질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 이외에도 전·후술하는 모든 내용들이 대마도는 한반도와 지척간에 있는 부속도서로서 우리의 정치 및 문화권에 상존해있었다는 것은 일본학자들이 증명하는 바이다. 대마도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문화유적과 생활습속들에 대해서『대마도·일기도 종합학술조사 보고서』(서울신문사, 1985) 및 일본인이 쓴『신대마도지』에 잘 정리되어 있다.
25. 세종 원년(1418년)에 있은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즉 기해동정(己革東征)이후 대마도는 계속하여 경상도 동래부의 소속 도서로 편입되어 조선정부의 통치에 임했다.
26. 속주화(屬州化)를 요청한 도주사신(島主使臣)의 요청 내용인즉 "밖에서 귀국을 호위하며…우리 섬으로 하여금 영토 안에 주군(州郡)의 예에 따라 주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시키는 대로 따르겠습니다(以爲外護貴國…若將我島 依貴國境內州郡之例 定爲州名賜以印信 則當效臣節 惟命是從)".(『세종실록』2년 윤1월10일)
27. 확고한 국가관을 가졌던 세종과 학자 김중곤(金仲坤)은『노비문기(奴婢文記)』에 두지(豆之: 대마도)인이 있는 데 대하여 "대마도는 곧 조선의 땅이며 그곳에 왜인(조선 도래인)이 살고 있다고 해서 무엇이 관계되랴"고 말한 데서 세종 때의 대마도 인식관을 알 수 있다(『세종실록』23년 11월22일) 세종 때 정승인 황희(黃喜)도 대마도는 예로부터 우리 땅인데 고려 말기에 국가기강이 허물어져 도적의 침입을 막지 못해 왜구가 옹고하게 되었다는 속주의식을 피력했다. 이와 같은 대마도 속주위식은 군신과 학자, 일반국민 모두의 머리와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28. 행장(行壯), 노인(路引), 문인(文引), 도서(圖書), 수직왜인(受職倭人), 통신부(通信符), 상아부(象牙符) 등의 각종 통행증을 발급한 것은 대마도민은 우리의 속민이었다는 것과, 무로마치 막부하의 일본이 스스로 요청하여 통교허가를 받은 것은 일본이 우리 조정에 대하여 조공을 바쳤다는 실증적 내용이다. 이들 통행증의 왕래와 검역은 거제도 지세포(知世浦) 만호가 담당하였다.(『세종실록』권4,8,82 등).
29. 일본 대마도의 수직왜인에게 내린 교지(敎旨: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관리의 임명장)는 군신간을 돈독케 하고, 임금에 대하여 충성을 다한다는 신하의 책무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교지의 내용을 볼 때 일본과 대마도 주민은 조선의 정치체제 안에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그들을 보살핀 조선정부의 성의가 내포되어 있다(中村榮孝,「受職倭の告身」,『한일관계사 연구』상권 p.585).
30. 한편 세조 때에는 대마도주 종성직(宗成職)의 수직을 추천하던 과정에서 대마도주에게 내린 교서에서도 "경의 조부가 대대로 우리의 남쪽 변경을 지켜서 국토를 보호하게 되었는데, 지금 경이 선조의 뜻을 이어서 더욱 공경하고 게으르지 아니하며 거듭 사람을 보내 작명(爵命)을 받기로 청하니, 내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숭정대부 판중추원사 대마주 병마도절제사를 제수한다"고 했다(『세종실록』7년 8월28일).
31. 그 후 성종과 연산조의 조정에서 대마도주에게 주는 서계(書契)에서도 "대마주는 우리 나라의 속신(屬臣)인데 어찌하여 조선과 대마도를 양국이라 칭하느냐. 너의 도주가 우리 조정에 신하라 칭하였으니 대마도는 조선의 일개 주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란 기사가 많이 본인다(『성종실록』25년 2월7일, 『연산군일기』 8년 정월 19일).
32. 이황(李滉)은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를 중국 역대왕조의 대오랑캐 정책을 원용하면서 부자관계로 보았다(『갑신포역절왜소(甲辰包勿絶倭疏)』, 『퇴계전서(退溪全書)』권6) 또 그는 세사미두(歲賜米豆)의 의미에 대하여 "대마도가 충성을 다하여 바다를 든든하게 지키는 수고로운 공적을 가상히 여겨 해마다 하사한다"고 하였다.(『에조답대마도주(禮曹答對馬島主)』권8).
33. 세종 26년(1444) 일기도 초무관 강선권의 보고서에는 "대마도에 대하여 일본국 왕의 명령이 미치지 못하는 섬"이라고 하여 일본의 본토와는 분명히 다른 지역(바로 조선의 섬)으로 파악하였다.(『세종실록』26년 4월30일).
34. 대마도는 경상도에 예속되었으니 문의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본도 관찰사에게 보고를 하여 그를 통해 제반사를 보고하도록 하고 직접 본조에 올리지 말도록 할 것이요, 겸하여 요청한 인장과 하사하는 물품을 돌아가는 사신에게 부쳐 보낸다.(對馬島隸於 慶尙道 凡有啓稟之事 必須呈報本島觀察使 傳報施行母得直呈本曹兼請請印篆竝賜物 就付回价)(『세종실록』2년 윤 1월23일, 『신대마도지』의 응구(應寇) 부분 참조).
35. 김성일이 서장관 허성(許筬)에게 보낸 답서의 내용에서 "대마도가 우리나라 조정의 은혜를 입고 우리의 동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으니 의리로 말하면 군신지간이요, 땅으로 말하면 우리의 속국이다"라고 말했다(『답허서장서(答許書壯書)』,『해사록(海 錄』권3).
36. 성종 18년에 대마도주의 서계(書契)내용을 보면 "영원토록 귀국(조선)의 신하로서 충절을 다할 것이다."(『성종실록』18년 2월 7일)로 되어있다.
37.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에게 보낸 경상감사의 답서내용인즉 "우리 나라와 일본은 형제와 같이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신의와 화목을 닦아 200여 년동안 조금의 틈도 없었다. 대마도는 우리의 속주로서 조선의 신하로 섬겼으므로 나라에서 심히 후하게 대접하였다. 세견선의 곡식으로 먹이고 수레의 포목으로 입혔으니, 섬의 모든 백성이 조상 대대로 그 덕을 입고 양육받지 않음이 없었다. 그로써 생활하였으니 모두가 상국인 우리 나라의 은혜이다."(『조선실록』2년 8월7일)
38. 일본 사학자인 중촌영효(中村榮孝)는 그의 논문에서 조선과 대마도의 속지관계(개연성)을 인정하면서, 일본측으로서는 대륙을 잇는 생명선과 같은 섬기기에 그것을 아전인수격으로 우긴 것에 지나지 않으며, 지정학적 여건을 볼 때 조선의 영토이었다고 실토하였다.
39. 송희경은 대마도 정벌 이후 이론에 회례사(回禮使)로 다녀오면서 대마도 만호 좌우문 태량을 만나 '조선과 대마도는 한 집안'이라고 말하고 같은 왕의 신하라고 하여 그들의 칭송을 받았다(『노송당 일본행록』2월21일). 이같은 주장은 당시 경상도 속주화 조치가 내려진 상황에서 대마도의 조선 속국관을 명백히 표현한 것이다.
40. 신숙주는『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서 일본(본토)와 완전히 구별하여 대마도를 일본의 행정구역인 8도 66주와는 구별하여 조선영토로 기술하고 있다.
41.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작성한〈팔도총도(八道總圖)〉라는 지도에 대마도가 조선영토로 표기되어 있다.
42. 17세기(1652)의〈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海東八道烽火山岳地圖)〉를 중심으로 한 18세기의 〈해동도(海東圖)〉 및 19세기 초 무렵의 〈해좌전도〉,〈대동여지도〉등 많은 실증적 지도류에 대마도가 한국령으로 표기되어 있다.
43. 대마도는 고려에 대하여 독자적으로 진봉선 무역을 하였고 무로마치 막부시대에도 일본으로부터 독립적 위치에 있었으며, 막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과의 무역도 독자적이었으며, 막부의 사신 호행(護行)도 하지 않았다(나종우 저『중세 대일교섭사』).
44. 고려의 막강한 지방전권에 관한 기사로 일기도(壹岐島) 구당관(勾當官), 대마도 구당관이 임명되어 대마도는 물론, 대마도에서 1천여 리나 떨어진 일기도까지 고려정부에서 섬의 지배자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외에도 지방호족들이 보낸 상인사절도 많이 보인다(나종우 저,『중세고려의 일본교섭사』.
45. 광해군 9년(1617) 통신사 오윤겸(吳允謙)이 쓴『동사상일록』에 의하면 "지성으로 조선에 대하여 사대하며 시종 한마음을 가져 원원히 조선의 속주로서 충성을 다할 것이다. 또 이 섬의 인민들은 오로지 우리 나라 난육(卵育)의 은폐에 힘입어 생계를 삼고 있는 처지에 있다"고 당시 대마도의 종속관계를 대마도주와 논했다.
46. 인조 21년(1643) 통신사 조경(趙絅)의 『동사록(東 錄)』의 망마주(望馬州)에 "조선의 쌀과 베가 배고플 때 너의 밥이 되고 추울 때는 너의 옷이 되었다. 너의 목숨은 조선에 달렸으니 너희들 자손 대대로 우리의 속민(屬民)이다. 대마도주는 제발 속이지를 마라. 그리고 조선에 충심을 다해 백 년토록 복을 누려라"로 되어 있다.
47. 숙종 45년(1719) 신유한의『해유록(海遊錄)』에는 대마도주와 의례논쟁을 하면서 "이 고을은 조선의 한 고을이다. 태수가 도장(圖章)을 받았고, 조정의 녹을 먹으며 크고 작은 일에 명을 청해 받으니 우리 나라에 대하여 속주(屬州)의 의리가 있다"로 되어 있다.
48. 영조 39년(1763) 조엄(趙嚴)의 『해사일기(海 日記)』에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소속이다.…이미 조선의 예 땅에 살면서 대대로 조선의 도서를 받았으며, 또한 공미(公米)와 공목(公木)으로 생활하니 대마도는 곧 조선의 영토이다'로 되어 있다.
49. 18세기 실증사학의 대가 순암 안정복의 문집 권10의『동사문답(東使問答)』에서 "대마도는 우리의 부속 도서이다. 대개 대마도는 신라·고려 이래도 국초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속도(屬島)로 대해왔다'고 했고『여지승람』에서는 "옛날 경상도 계림땅에 예속되었다"라고 하였으며, 태종이 기해년에 대마도를 정벌할 때 교서에서도 대마도는 본래부터 우리 나라 땅이었다고 하였다. 그 이외에도 수많은 증거물이 있다. 그리고 그 땅을 정벌한 일은 마땅히 중앙의 속도(屬島)를 꾸짖는 방책이었다고 적어 놓았다.
50. 영조36년(1765)에 제작된『여지도서(與地圖書)』와 순조 22년(1822)에 편찬된『경상도읍지』등에는 대마도가 '동래부 도서조(島嶼條)'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대개『신증 동국여지승람』의 대마도 인식을 보완한 것이다.
51. 영조39년(1763) 통신사행의 서기였던 원중거(元重擧)는 "대마도는 일본 내국과는 전혀 다르다. 일본인은 항상 대마도인을 오랑캐(蠻夷)라고 부르며 사람축에 끼워주지를 않았다. 이것은 대마도가 한국땅임을 그들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본인의 대마도 구분의식은 『풍습(風習)』『대화국지(大和國志』등에 나와있다.
52.. 〈해좌전도(海左全道)〉에 이어〈대한전도(大韓全圖)〉,〈조선전도 해동도(海東圖)〉, 〈팔도전도(八道全圖)〉, 〈팔도총도(八道總圖)〉, 〈팔도지도 경상도 부분도〉 및 18~19세기의 지도 등에서 대마도가 한국영토로 나타나 있다.
53. 거리상으로 부산에서 대마도까지는 50㎞, 대마도에서 일본 규슈의 하카타(博多)까지 최단거리는 142㎞나 된다. 국제법으로 따져도 명확한 한국의 연안섬이다.
54. 대마현지의 역사유적(승문 및 미생식 문화유적, 각종 신사, 조선식 산성)과 생활습속 및 동·식물류, 돌과 풀, 조선언어와 그곳의 주민 등 그 모두가 우리의 것이다(『일본서기』의 내용, 『신대도지』,『통신사의 견문록』,『조선왕조실록』의 기사내용).
55. 대마 만송원(萬松院)의 종가무덤에서 32대 의화(義和)의 묘비에(1842년, 조선 헌종9년)종삼위 종조신 의화경오묘(從三位宗朝臣義和卿奧墓)라고 크게 쓰여 있다. 종가 말녀의 분묘에서(메이지 직전까지)종가는 조선의 신하로서 역할을 다했다는 것은 그 이전까지도 대마 종가는 조선의 가신(家臣)으로 그 의무에 충실했다는 것과 대마도가 조선의 속주임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56. 임진왜란(1952년) 및 한말의 국력쇠잔과 일제의 병탐에 의해 1869년 판적봉환을 이즈하라(嚴原藩)로 하고, 에이지 정부는 1877년 중앙집권의 폐번치현(廢藩置縣)에 의거, 일본의 나가사키현(長崎縣)에 강제 편입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그 이전에는 조선의 예속된 땅임을 스스로 입증한 것이다.
57. 대마도의 송포윤임(松浦允任)이 지은『조선통교대기(朝鮮通交大紀)』권1, 원통사공(圓通寺公)에서도 대마 문적(文籍)에 대하여 "생각컨대 아주(我州: 대마도)가 본래 조선 경상도의 속도였다는 것이 언제나 일본과 대마도의 서(書)에 보인다. 또『여지승람』에도 아주를 동래의 속도(屬島)라고 하였다. 조선측에서도 자주 이 구절을 인용하지만, 문적(『한단고기』,『삼국사기』,『삼국유사』, 그 외의 史書)에 관해 토론을 하였다. 뒤에 이익과 안정복 등이 대마속국론을 들고 나온 것은 지당한 일이라 본다" 하였다.
58. 종가문서를 통해 본 대마도는 각종 서계(書契)에서 1851년(철종2년)에도 신해년 6월 세계편선에 대마도에서 보낸 서계와 봉진예물을 받았다는 내용 등이 조선과의 속주관계를 증명하고 있다.
: 에도 막부 장군의 측근이 대마도 고위관리에게 한 말. 서기 1617년 통신사 이경직이 자신들(통신사 일행)을 수행하던 대마도의 고위관리에게 이 말을 듣고 적어 놓았다.
"대마도는 … 대대로 우리 조정의 은혜를 받아 조선의 동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으니, 의리로 말하면 임금과 신하 사이요, 땅으로 말하자면 조선에 부속된 작은 섬이다."
: 서기 1590년, 임진왜란 직전에 통신사 부사로서 일본을 다녀온 김성일이 조선에 돌아온 뒤 낸 보고서에서
"우리 대마도에게 조선 영토 안의 주 군(州 郡)의 예에 따라 주(州)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 : 도장)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 서기 1419년 대마도 정벌 뒤에 대마도주가 보낸 서신에서.
"대마도에 대한 본격적인 속주화 작업은 조선 세종 때 이뤄졌다. 1419년 이종무 장군이 병선 227척에 1만7000명의 대군을 끌고 대마도를 정벌한 것이다.1436년 대마도의 식량 사정이 어려워 지자 도주인 소우 사다모리는 대마도를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코 도주를 태수로 봉했다. 그래서 18세기 초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방문한 신유한의 ‘해유록(海游錄)’은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이 섬은 조선의 한 고을에 지나지 않는다. 태수가 조선 왕실로부터 도장을 받았고 조정의 녹을 먹으며 크고 작은 일에 명을 청해 받으니 우리나라에 대해 번신(藩臣)의 의리가 있다.
"(전략) … 이곳은 일본 국왕의 명령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중간에서 망령되게 자존하면서 포악하오나, 이들 모두 도서(圖書)를 받고 우리 조정에 귀순하기를 바라고 있사오니, 바라옵건데 이 섬의 두목들에게 예전처럼 오고 가게 하고, 이따금 양식이나 주고 도서를 주어 뜻밖의 우환에 대비하게 하소서."
: 서기 1444년 대마도에 보내졌던 초무관 강권선이 세종에게 보고한 글.
"무릇 대마도는 옛날에는 신라국과 같은 곳이었다. 사람의 모습도 그곳에서 나는 토산물도 있는 것은 모두 신라와 다름이 없다."
: 13세기 말의 일본 책인『진대(塵袋)』 제 2권에서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는 선종 2년(1085) 이래 대마도주를 '대마도구당관(對馬島勾當官)'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이 점이 시사하는 바는 상당히 흥미롭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제주도의 성주(星主)를 '탐라구당사'(耽羅勾當使)로, 일기도(일본 큐슈 이키섬) 도주(島主)를 일기도구당관이라고 명명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당관은 고려시대 변방 지역 내지 수상(水上)교통의 요충지를 관장하는 행정 책임자들에게 붙인 관직명이다. 이를 보면 탐라, 대마도, 일기도의 지배자에게 고려가 구당사 혹은 구당관이란 명칭을 붙인 의미를 알 수 있다. 즉 앞의 세 섬을 고려의 속령으로 인식하였거나 아니면 고려 정부가 대마도와 제주도를 고려 고유의 지배 질서 속에서 같은 차원으로 취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하우봉의 논문『한국인의 대마도인식』에서
"대마도는 섬으로서 본래 우리 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 부터 뛰어 놀기 시작하였다." : 태상왕이었던 태종이 세종 때 대마도 정벌을 하기 전에 군사들에게 내린 교유문에서 "대마(:대마도)는 섬으로서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되었던 바 본시 우리 나라 땅이라는 것이 문적(文籍 : 서적, 기록)에 실려 있어 확실하게 상고할 수 있다. 다만 그 땅이 매우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들이 살지 않았을 뿐이다. 이에 왜놈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자들이 몰려와 모여 살며 소굴을 이루었던 것이다."
: 대마도를 정벌한 뒤 대마도주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목마지(牧馬地 : 말 기르는 땅)이므로 대내전(大內殿)이 조선과 더불어 협공하여 대마도를 귀국(:조선)에 돌리고자 하다가 불행히도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의 영주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 대마도 정벌 이후 일기도로 파견된 조선 관리인 강권선에게 일기도 영주 대내전 (大內殿)의 관반(館伴)인 노라가도로(老羅加都老)가 한 말.
ㅇ.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조선시대에 간행된 지도는 거의 빠짐없이 대마도를 우리나라 영토에 포함시켰다.
ㅇ.18세기 중반에 제작된 해동지도는 우리 영토는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은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對馬)와 호남의 탐라(耽羅)를 양발로 삼는다’고 명기했다.
ㅇ.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만든 팔도총도라는 지도도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기했다.
ㅇ일본의 대마도 편입은 19세기 후반 19세기 후반 일본 메이지 정부는 대마도를 일본에 편입시켰다. 1868년 대마번(藩)이 메이지 정부에 올린 봉답서를 보면 대마번이 조선의 번속국이었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조선에 대해 번신(藩臣)의 예를 갖추어 수 백 년 간 굴욕을 받았으니 분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지금의 서계부터 조선이 주조해 준 도서 대신에 일본 조정이 만들어주는 새로운 도장을 사용하여…”
ㅇ이승만의 “대마도는 우리 땅” 선언
정부수립 직후인 1949년 1월8일 이승만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해 현해탄에 거센 파도를 불러일으킨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의 요시다 내각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맥아더 장군에게 이 대통령의 요구를 막아
달라고 손을 내밀기도 했다.이 대통령은 이후 공식 문서나 외교채널을 통해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각국의 외교사절을 만날 때마다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와 함께 이 대통령은 바다에도 ‘이승만 라인’이라는 어업구역을 설정해 이를 침범하는 일본 어선을 붙잡도록 했다.
ㅇ대마도와 부산 간 거리는 49.5km인 반면 대마도와 일본 규슈(九州)는 147km나 떨어져 있다. 대마도 주민들은 1950년대 초반까지 저녁 때 배를 타고 부산에 가서 술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놀다가 이튿날 아침에 돌아왔던 것을 기억한다. 이후 오랫동안 부산∼대마도간 뱃길이 끊겼으나, 1999년 정기여객선이 운행되면서 대한해협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특히 올해 서울∼부산 간 고속철도(KTX)가 개통되면서 대마도는 서울에서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섬이 됐다. 한국의 자연과 역사가 숨쉬는 섬 대마도에는 산고양이, 말, 고려꿩 등 일본열도에서는 볼 수 없는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고 이 섬의 웬만한 사찰에는 신라불이나 고려불이나 조선의 범종이 모셔져 있다.
또한 대마도에서 우리 휴대폰을 켜면 안테나 5개가 기운차게 뻗어 오른다 한다. “휴대폰이 터지는 곳은 우리의 영토입니다”
시민단체 활빈단(단장 홍성식)이 한 일본 극우단체의 독도상륙 시도에 반발, 8월 중 일본 대마도까지 열기구를 타고가 ‘대마도=한국땅’이라는 선언을 하기로 한 가운데 국내 역사학자가 이 주장을 뒷받침 할 역사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해 새삼 주목을 끌고 있다.
원광대 나종우 교수(원광대 사학과·한일관계사)는 6일 KBS 라디오 시사 플러스에 출연해 “대마도는 삼국시대부터 임진왜란 전 까지 우리 땅 이었다는 사료가 광범위 하게 남아 있다”고 말했다.
나 교수는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 땅이었다며 임란 전 까지 조선시대 때 변방에 파견하는 관리였던 경차관, 채찰사등이 대마도를 통치했다”고 설명했다.
나 교수는 “세종원년(1419년) 대마도 정벌 때 근거로 삼은 것은 ‘대마도는 본래 우리땅’이라는 태종의 교유문이었다는 게 세종실록에 기록 돼 있다” 며 “일본의 역사 자료에도 대마도가 조선 땅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덧붙였다.
나 교수는 “13세기 일본의 사서 ‘진대’ 에 신라사람들이 살았다”는 기록을 비롯해 “1723년 대마도의 대학자 등정방이 편찬한 ‘대주편련락’이라는 책에도 ‘대마도는 고려국의 목(행정구역)이다는 대목이 있다”고 설명했다.
나 교수는 또 동아닷컴과의 통화에서 일본 고사기에서 대마도를 지칭하는 진도(쓰시마)는 ‘한반도에 가는 배가 머무는 곳’, 일본서기에 나오는 한향지도는 ‘한국의 섬’ 이란 뜻이라고 추가 설명했다.
그렇다면 대마도는 언제부터 일본 땅에 편입 됐을까.
나 교수는 그 시점을 임진왜란으로 꼽았다.
“농경사회였던 조선이나 일본 모두에게 척박한 땅인 대마도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조선에서는 대마도 주민에게 식량을 대 주어야 했기 때문에 그 곳 통치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일본이 임란 때 대마도를 한국 침략의 거점으로 이용하며 가치를 알아보고 자기네 영토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마도가 확실하게 일본 영토로 인정받기 시작한 시점은 1950년대 초 라는게 정설.
나 교수에 따르면 임란 이후 양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 대마도 영토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하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싹튼 민족의식은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8월18일 대마도 반환을 최초로 주장하게 만들었고 일본이 이에 즉각 반박하면서 대마도에 대한 양국의 관심이 본격화 됐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에서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3년동안 학자들에게 ‘대마도 연구’를 집대성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 ‘대마도=일본땅’ 이라는 논리적 근거를 완성했다는 것.
나 교수는 “1965년 한일협정때는 다른 중대사안에 밀려 거론조차 하지 못했고 그 이후에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응하느라 한국정부는 대마도 문제는 거론조차 못했다”며 아쉬워 했다.
나 교수는 “일본은 시끄러울때 마다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그들과 똑같이 한다면 감정적 대응밖에 안 된다. 하지만 대마도는 부산에서 불과 5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우리땅이다(대마도~후쿠오카는 147km). 우리는 만주만 잃어 버린 게 아니라 대마도도 잃었다”며 “대마도는 언젠가는 되 찾아야 할 땅이라는 생각을 갖고 정부에서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중국은 '일본이 중국의 만주철도부설권과 맞바꾼 간도협약'은 마치 '중국이 자국의 이익을 빌미로 일본에게 장물인 간도를 불법적으로 취득한 행위'이니 역사왜곡 동국공정 그만두고 불법점유하고 있는 간도를 즉시 한국으로 반환하라.... 日本製品 不買運動 / 해방 후 1948년에 주장하였으나 미국에 의해 무산된 대마도의 한국령을 선포하는 계기로 삼아야.... / 日독도영유권 주장은 "제2의 침략과 탈취행위" / 独島は日本の領土? 日本は大韓民国の領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