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학계에서는 고구려 역사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당시까지는 고구려에 대해 단지 중국의 동북지역에 존재했던 고대국가의 하나였고 백제, 신라와 더불어 삼국을 이룬 나라로서 한국사에 속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해서 고대 민족사를 파악하게 되었다.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란 “중국은 현재 뿐 아니라 자고이래 통일적 다민족 국가였기 때문에 오늘날 중국 영토 안에서 일어난 과거사를 모두 중국사로 간주한다.”는 중국의 역사서술 원칙을 말한다. 중국은 1949년 정부 수립과 더불어 변경지역의 소수민족에 대한 통합정책을 적극 추진하기 위해 이러한 ‘영토지상주의적 역사관’을 확립했다. 그러나 이것이 본격적으로 영향을 떨치게 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였다. 개방을 앞두고 각기 다른 역사적 경험을 가진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된 중국 국민들에게, 같은 중국인이라는 역사의식과 국가관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동요와 분열을 방지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사의 귀속문제가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 시기 중국학계의 고구려사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고구려사를 중국 북방의 소수민족 역사로 파악하는 견해이다. 둘째는 현재 중국 영토에 속하는 평양 천도(427년) 이전의 고구려사는 중국사이고, 천도 이후는 한국사에 속한다고 이해하는 시각이다. 이는 하나의 역사를 양쪽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므로 ‘일사양용설(一史兩用說)’이라고도 한다. 셋째는 고구려사를 고대 한국사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두 번째 시각으로 보는 연구자가 많았었다.
그러나 중국의 동북 지역과 한반도의 정세가 변화된 1990년대 중반이후부터는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보는 입장이 단연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에 따라 독립적으로 진행되었던 소수민족의 과거사까지도 모두 중국사에 속하게 되었다. 이는 분명 현재의 목적에 따라 자행된 역사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에 들어와 고구려사를 한국사로 보는 견해는 물론 일사양용설(一史兩用說)까지 비판하면서 고구려사 전체를 중국사로 귀속시키는 논리가 힘을 떨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고구려사연구는 2002년 동북공정이 가동되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결과물들이 대량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이 연구물들의 기본적인 인식은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것이었다.
중국학계에서는 고구려사가 중국사에 속한다고 보는 그들의 논리를 입증하기 위해 다양한 측면에서 연구를 진행했는데, 다룬 주제는 대략 여섯 가지 정도로 압축된다. 즉 첫째, 고구려의 종족기원과 건국과정 문제, 둘째, 고구려와 중국의 조공책봉 문제, 셋째, 평양천도 이후 고구려사의 귀속문제, 넷째, 려수․려당 전쟁의 성격문제, 다섯째,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의 거취에서 본 귀속문제, 여섯째, 고구려의 역사계승에 대한 문제 등이다. 아래에서는 각 주제에 대한 중국측의 논리와 그에 대한 우리 학계의 비판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보겠다.
(1) 고구려의 종족기원과 건국과정 문제
199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중국학계에서는 고구려를 건국한 종족이 맥족(貊族), 예맥족(濊貊族), 또는 부여족(扶餘族)이라고 보았다. 물론 이렇게 볼 때에도 이들이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이라는 점은 빼놓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는 고구려사를 한국사와 완전히 단절시키기 위해 고구려를 구성한 종족 자체가 원래부터 한국과 전혀 관계없는 중국계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고구려 선조가 상인(商人)에서 분리되었다고 하는 가설이다. 요서지역 홍산문화(紅山文化)를 상(商)의 선대문화로 보고, 이 지역에 있는 대형적석묘를 고구려 적석묘의 연원으로 설정한 다음, 상의 건국 전후 또는 상인이 중원으로 이주할 무렵 동북방으로 옮겨간 한 지파가 고구려족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일주서(逸周書)』「왕회해편(王會解篇)」에 나오는 ‘고이(高夷)’를 고구려 선인(先人)이라고 지적했다. 이 설은 최근 중국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인 전욱(顓頊) 고양씨(高陽氏)의 후예가 바로 고이(高夷)이며, 고구려 왕실이 스스로 고양씨의 후예임을 자처하여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는 주장으로까지 비약했다.
이와 달리 고구려 주민집단을 염제족(炎帝族) 계통의 지파로서 중국 산동지역으로부터 압록강 중류일대로 이주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지지자가 많지 않다.
그런데 중국측이 근거하고 있는 책인 『일주서』는 편찬자와 편찬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며, 많은 문제점을 가진 역사서라고 일찍부터 신빙성에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그러므로 『일주서』의 사료를 근거로 하여 고구려의 기원을 설정하는 주장은 역사연구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사료비판 단계에서부터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고구려는 원래 ‘성(城)’을 가리키는 ‘구루(溝漊)’, 국가를 의미하는 ‘구룬’ 등에서 나온 ‘구려(句麗)’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뒤에 규모가 커지면서 ‘크다’, ‘높다’는 의미의 관형사 ‘고(高)’를 붙이게 되었다. 이는 왕망(王莽)이 고구려를 격하하여 ‘하구려(下句麗)’라 불렀다고 하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따라서 ‘高’라는 글자가 같다하여 고구려를 ‘고이(高夷)와 연결시키는 것은 잘못된 주장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욱 고양씨는 중국인들 자신도 그 실존 여부를 의심하고 있는 전설상의 존재이다. 또 전욱 고양씨를 실존 인물로 본다 하더라도 이를 『일주서』「왕회해편」의 고이와 직접 연관시킬 만한 논거는 없다. 전욱 고양씨는 기원전 2500년경의 인물이고, 고이는 기원전 10세기경의 종족으로서 양자 사이에는 무려 1500여년이라는 시간적 간극이 있다. 중국학자들은 또 고구려 적석묘가 홍산문화에서 유래되었다고 보지만, 양자 사이에는 무려 3000년 가까운 시간차가 존재한다. 따라서 중국측의 설은 근거가 빈약한 가설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우리 학계로부터 제기되었다. 그러자 중국학계에서도 그런 점을 고려했는지, 최근에는 예맥(濊貊)․부여(夫餘)․고이(高夷)․상인(商人)․염제족(炎帝族), 한족(漢族)이 결합하여 만든 다민족국가인데, 그 중 중심은 漢族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우리 학계에서는 중국 정사에도 자주 등장하는 예(濊)⋅맥(貊)⋅예맥(穢貊)이 고구려를 건국한 주체세력이라고 보고 있다. 물론 고구려의 종족기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예족설, 맥족설, 예맥족설, 예맥족에서의 분화설, 원래는 예족인데 명칭상 맥족이라는 설 등 여러 견해로 나눠져 있어 정설이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이들이 중국의 한족이나 유목민과 다른 고유한 종족으로서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 농경을 영위하던 사람들임은 그 문화적 성격을 통해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2) 고구려와 중국의 조공책봉 문제
중국학계에서는 고구려가 중국에 대해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으므로 독립국가가 아닌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당시의 실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를 비롯한 중국사서, 즉 그들의 일방적인 시각에 따라 서술된 사료를 자구 그대로 이해한 위에서 이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중국 사서는 기본적으로 중화관(中華觀)에 입각하여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서술해 놓았다. 따라서 그들 스스로 자국의 역사를 서술할 때에도 명분상, 자구상의 조공책봉이라는 관계와 실질적인 상황을 구분해서 파악한다. 그런데 유독 고구려와의 관계에 대해서만은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역사의 실상을 보여주는 많은 자료들을 무시한 채 오직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사료만을 골라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책봉과 조공은 본래 중국 내부에서 중앙의 황제와 지방 사이에 맺어지는 정치 질서였지만, 점차 확대되어 국가간의 외교 형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전근대 시기에 중국과 주변 국가들 간에 이루어졌던 국제무역의 한 변형된 형태이기도 했다. 따라서 실제 중국과 동아시아 각국 간에 맺어졌던 조공책봉관계는 중국측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명분과 실제적인 상황이 전혀 별개로 진행되었다.
예컨대 후한대 고구려와 현도군의 관계를 보면, 중국학계의 주장처럼 고구려가 현도군에 소속된 제후국이었던 것이 아니라, 현도군과의 대결과정에서 예맥족이 결집하여 국가를 세우고 그 과정에서 더욱 발전해가는 형태였다. 즉 고구려와 중국 군현의 관계는 중국학계의 주장처럼 화평관계가 아니라, 충돌이 계속되는 적대적인 관계였다. 고구려는 중국 군현 안에서 출발해 황제에게 조공하고 책봉을 받으며 존재했던 지방정권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과의 투쟁을 통해 국가의 성립과 발전을 이룩한 나라였던 것이다.
더욱이 조공․책봉제가 강화된 시기였다고 하는 남북조 시기에는 오히려 독자적인 상태에서 남조와 북조, 양 왕조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다. 고구려는 두 왕조와 모두 조공책봉관계를 맺고,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두 왕조와의 관계를 자율적으로 조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왕조도 고구려에 대해 정치적 간섭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국과 적대적인 왕조에 조공하고 책봉하는 데도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못했다. 이를 흔히 등거리외교라고 부른다.
요컨대 조공책봉제는 전근대시기에 동아시아 전체에 걸쳐서 적용된 외교 형식이자 무역방식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고 조공책봉관계를 맺었다는 것만 가지고 지방정권이었다고 한다면, 신라, 백제, 왜, 안남 등 중국과 조공책봉관계를 맺었던 모든 나라들을 다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해야 한다.
보다 유념해야할 것은 고구려가 당시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자국 중심의 독자적인 천하를 구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구려는 6.39m의 거대한 광개토왕비에 자신들이 천손족(天孫族)이었음을 당당하게 새겨 넣었다. 그리고 자기 나라 왕을 성태왕(聖太王), 태왕(太王) 등으로 높여 불렀다.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런 일은 중국 황제의 신하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황제는 그에 대해 전혀 이의제기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새겨넣은 광개토왕비가 발해 멸망 후 줄곧 중국 땅 안에 있었지만 파괴되지 않고 지금까지 의연히 서있다. 이는 결국 조공책봉이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증거가 아니었으며, 조공책봉 문제는 중국측이 내세우는 명분과 실제상황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3) 평양천도 이후 고구려사의 귀속문제
중국학계에서는 “현재의 중국 땅 안에 속하는 모든 지역의 과거사는 모두 중국사”라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해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자 평양 천도 이후의 고구려사와 이전의 고구려사를 분리해 보아야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런 점에서 일사양용설이 나오기도 했지만, 동북공정이 본격 가동된 이후에는 설을 바꾸었다.
즉 “역사상의 귀속문제는 모든 역사를 전반적으로 검토하여 그것이 주로 어떻게 귀속하였나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한다.”고 하며, 영토의 크기나 존속기간 등에서 현 중국영토의 고구려사가 대세를 이루고 있으므로 고구려사는 중국사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한반도에서의 고구려사 기간이 427년부터 668년까지 241년간인데 비하여, 중국영토 즉 중국사로서의 고구려사 기간은 기원전 37년부터 기원후 427년까지 464년간이나 되어 2배가량이나 되고, 고구려 땅의 약 2/3가량이 현 중국의 영토 안에 있으므로 중국사에 귀속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설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평양은 현재 북한 영토에 속하지만, 고대에는 한사군이 설치되어 있던 중국 땅이었으므로 그 땅에서 전개된 역사도 곧 중국사라는 주장도 내놓았다. 즉 현 중국영토 안에서 건국된 고구려사는 중국의 영토 안이기 때문에 중국의 지방 정권이고, 현 북한영토 안에 있었던 고구려사, 즉 평양천도 이후의 고구려사는 고대시기에 중국의 영역 안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사로 포함시켜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런 인식에 따르면 고대 중국 역사의 남쪽 경계선이 대동강으로 되고, 또 더 나아가 전성기 고구려의 남방한계선을 고려하면 한강유역까지도 모두 중국사에 속한다는 주장까지 나올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현재의 영토에 기준을 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과도 모순되는 설로서, 그 모순을 덮으려 하다 보니 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4) 려수․려당 전쟁의 성격문제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고, 고구려왕은 황제의 신하였다고 보는 입장에 서면 역사상에 나타나는 제반 사건도 모두 그에 따라 재해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는 두 왕조에 걸쳐 벌어졌던 역사적인 대전쟁이었던 려수, 려당 전쟁에 대해서도 국제전이라 보지 않고 중국내부의 통일전쟁이라고 보고 있다.
중국학계에서는 역시 중화주의적 시각에 따라 전쟁의 명분으로 삼기위해 발표한 『수서(隋書)』나 『당서(唐書)』등에 보이는 수 문제의 조서, 수 양제의 조서, 당 태종의 조서를 문구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로써 실제 역사상을 구성하고 있다. 이 때문에 책봉에 의한 고구려와 수, 당의 신속(臣屬) 관계를 깨뜨린 고구려의 잘못을 응징한 것이라고 고구려 원정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고구려에 대한 수․당의 정벌은 국가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중원 통일정권이 지방정권의 이탈을 막고 본래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벌인 민족 내부의 통일전쟁이었다고 그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적은 중국측의 사료에서도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수당과의 전쟁과정에서 발생한 포로를 상호 교환하자고 하는 제의를 한 부분을 보면, 중국측에서 “두 나라의 포로”라고 한 것이 사료상에 남아 있다. 하지만 중국학계에서는 이런 사료들은 전혀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설에 부합하는 사료만을 채택해 역사를 구성하는 반역사적인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다.
고구려와 수, 당의 전쟁은 두 세력권 사이의 충돌과 갈등의 결과였다. 수당은 중원을 통일한 후 자국 중심의 중화적 세계를 동아시아 일대에 완벽하게 구현하기 위해 고구려에 실질적인 신속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고구려는 그때까지 유지해왔던 자국 중심의 독자적인 천하를 지키려고 했다. 두 개의 천하, 두 개의 세력권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질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결국 두 세력권이 충돌한 국제전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수, 당과 고구려와의 전쟁은 수, 당의 침공을 맞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 대외항쟁이자, 국가간의 대외전쟁이었던 것이다.
(5)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의 거취에서 본 귀속문제
중국학계는 고구려 멸망 후에 그 주민의 상당수가 중국으로 들어가 한족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사는 중국사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구려 멸망 후 상당수의 사람들은 중국내지로 바로 들어갔고, 일부는 요동에 남아 있다가 발해건국에 참여했고, 일부는 돌궐로 들어갔다. 그러나 발해로 간 사람들이나 돌궐로 간 사람들도 발해와 돌궐의 멸망 이후 모두 중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신라나 일본으로 건너간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국인으로 되었다. 중국에서는 이처럼 주민의 절대 다수가 중국인으로 되었으므로 고구려사는 중국사에 귀속된다고 하고 있다.
고구려 멸망이후 상당수의 고구려인들은 당으로 들어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거취를 결정할 수 없었다. 패전국민이자 망국민이었으므로 당의 정략적인 이주정책에 의해 고향산천을 버리고 강제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요동에 남아 있다가 발해를 건국한 사람들이나, 당의 지배를 피해 돌궐로 들어갔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발해가 멸망하고, 돌궐이 당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중국인이 되었다. 도도한 역사적 운명 앞에 망국민의 후손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비해 신라로 내려온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거취를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당과 같은 적국임에도 불구하고 신라를 택했던 것은 삼국 간 교류를 통해 쌓은 동류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고, 또 무엇보다 신라의 힘을 빌려 당과 싸워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고구려 부흥의식, 고구려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유민의 거취문제를 생각할 때에는 당시 상황이 일반적인 평화시기와 달리 전쟁에 패해서 나라가 망한 상태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유민이 어디로 갔는가 하는 점은 숫자나 양적인 면에서 따질 문제가 아니다. 여러 사람들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할 대상은 신라로 간 사람들이었다. 신라에서는 이들을 받아들인 후 고구려를 부흥한 보덕국을 세워주었다. 그리고 통일신라가 고구려, 백제를 통합하여 역사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일통삼한(一統三韓)’의 강조가 바로 그 증거이다. 고구려, 백제 유민들은 또 신라와 함께 대당항쟁에 앞장서기도 했다. 신라로 간 고구려유민들은 신라 안에서도 고구려유민이란 자의식을 계속 가지고 살았다. 신라의 분열기에 고구려를 계승한 태봉, 후고구려가 성립된 것은 그런 상황을 잘 보여준다.
요컨대 고구려유민의 귀속문제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할 것은 망국민인 그들이 자의적으로 택한 길이 무엇이었나 하는 것과, 그들이 고구려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고구려사의 귀속문제, 고구려인의 계승문제를 따질 때에는 무엇보다 고구려 계승의식이 단지 인식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 역사적인 면에서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여부에 더 중점을 두고 살펴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여 ‘일통삼한’을 이룩했음을 강조한 통일신라나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국초부터 강조했던 발해와 고려의 역사를 중시해야 한다.
(6) 고구려의 역사계승에 대한 문제
중국학계는 고구려사와 한국사와의 관계를 차단하기 위해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와 왕건이 세운 고려는 이름만 비슷할 뿐 서로 계승관계가 없는 타국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구려와 고려는 본래 족속(族屬)이 다르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중국 역사상의 국가로 오늘날 중국인의 선조가 세운 나라였으나, 고려는 오늘날 한국인의 선조인 신라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라는 것이다. 이 두개의 국가가 각기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했기 때문에 두 나라가 마치 무슨 관계가 있는 양 오인된 것이지 실제로는 전혀 계승관계가 없다고 강변하고 있다. 중국측에서는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 자국의 정사인 『송사(宋史)』에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기록된 것 자체가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오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태조 왕건이 국호를 고려로 한 것은 분명히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고구려의 수도였던 서경(평양)을 중시했고, 북진정책, 고토회복정책을 추진해나갔다. 또 왕건의 선조인 호경(虎景)은 고구려의 옛 땅인 백두산 일대에 살다가 황해도 지역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왕건의 측근 가운데에는 평안도 출신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모두 태생적으로 보면 고구려유민의 후손이었다.
고려 사람들은 스스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있었다. 서희장군이 거란의 소손녕을 만나 자신들의 선조인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있는 거란을 비판함으로써 외교를 통해 거란족 침입을 물리친 일은 당시 고려 사람들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고려사람들이 고구려 역사를 계승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전왕조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함께 다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저술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발해 멸망 후 발해의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준 것도 발해나 고려나 모두 같은 고구려의 후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가 자기들 선조의 역사라고 보는 인식은 고려 사람들에게는 말할 필요가 없는 기본 상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인들도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인식했고, 그 결과 중국 정사에 고구려-고려로 이어지는 계보가 서술되었던 것이다. 즉 중국정사를 쓴 그 선조가 잘못된 역사해석을 한 것이 아니라 그 후손들인 오늘날의 중국 역사학자들이 현재의 필요에 따라 선조들이 올바르게 서술해놓은 과거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고조선의 건국신화 우리 최초의 민족국가인 고조선과 고구려사를 우리 스스로가 포기하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진행하는 과정 중 그들의 이야기는 '고조선의 신화를 한국학계에서 스스로 부정하지않았나?' 그래서 너희들 역사가 아닌 우리변방의 역사를 우리가 바로잡겠다는것이 그 취지이다 라고했습니다.
우리는 동북공정을 통해 잊혀진 역사와 빠트린 역사를 찾고저하는것이다.라고 강변 합니다.
이 세상어디가도 자기나라 건국신화를 부정하는 민족은 한국밖에 없습니다. 특히 한국기독교계에서 그들은 유대족의 건국신화와 설화는 구약이라는 경전으로 받들고있지만 자신의 뿌리에 대하여서는 폄하하고 비하하고있어 이를 중국이 국제적 관계가 미묘할때 이용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분열된 논리의 틈새에 중국이 우리 상고사에 끼어들 기회를 제공한것입니다.
동북공정 선전문구에 한국학교에서 어느 기독교인이 단군상 흉상을 잘라버린 사진을 크게 개제하였더군요 이런 사소한 일들이 그들에겐 큰 빌미를 제공한것입니다.
단군신화는 민족의 역사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달리 생각할 것 없이 그냥 오래전에 구전되어온 역사이다 라고 생각 하면 됩니다.
구약의 진위가 어떠하고 하는 논쟁의 종지부는 5천년이 지난 1947년에 사해문서가 발견되어 그 역사성과 진실성이 입증되지 않았습니까?
유대인들이 구약성서를 그들의 고대사이고 민족의 수난 사이며 또한 선조들의 족보라고 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어느 민족이나 그 사실 진위여부를 떠나 그들만의 상고사가 있습니다 이것을 신화일수도 있고 전설이되 어 있을 수 있습니다.
신화가 태양에 빛이 바래면 역사가 되고 전설이 달빛에 퇴색되면 사실이 되는 것이 이 세상에 만고의 진리 입니다.
호메르수의 일리아드 오디세이가 3천년전의 영웅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들은 이 서사시를 단순 이야기이고 노래이고 아킬레우스의 분노 정도 헬렌의 처사를 노래하는 전설 정도로 생각했으나 1873년에 3천년전의 거대한 트로이 궁전이 엄청난 보물과 함께 지상으로 신화가 아닌 전설이 아닌 역사적 사실로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또 중국진나라 진시황제의 기마 군단이 1977년 한 농부의 손에 이끌려 엄청난 세력으로 현실의 역사 앞에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단지 우리는 고조선시대의 신화와 같고 전설과 같은 이야기들을 역사의 현실로 이끌어 낼 수 있는 민족의 저력이 없는 것뿐입니다. 간혹 단군영정이 우상이다 뭐다라고 소모성 논쟁을 보면 그들은 뿌리를 근저가 어디인가 라고 의문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민족의 태동기에 있었던 사실입니다 단지 기록문화의 후진성때문에 논리성과 진실성에대한 의혹을 가져 다 주고 있을 뿐입니다.
2007년 2월 우리나라 정부는 다음과 같이 발표했습니다
고조선은 단군이 건국했다고 삼국사기등에의 해 전해지고있다... 라고 한 것을 고조선은 단군이 건국했다... 라고 정부가 공식 발표하여 단군이 우리의 역사에 정식 등장했습니다. 해방이후 우리의 역사가 얼마나 처참했으면 단군이 고조선의 시조로 등장하는데 무려 62년이 걸렸습니다 이게 우리의 역사 입니다
월드컵 당시 한국응원팀의 이름이 붉은 악마였습니다 고조선 이전 배달국의 치우천황의 용맹성을 그려 응원단 명칭을 부쳤는데 우리 사학계에는 이를 전면 부정 하고있습니다 즉 고조선 이전의 역사 를 인정하지않는 강단 사학계입니다
그런데 중국이 이 치우천황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오렷다는 중앙일보 기사를 인용합니다.
'치우천왕'도 중국인 조상으로 올려
중앙일보 2007-02-10
이는 중국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중화민족의 일원이라는 중국 중심적 역사관을 반영한 것으로 분석된다. 전설상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한 명인 복희(伏羲)에서 중국의 성씨가 시작하는 것으로 그렸다. 중국인들이 그동안 자신들을 '염황자손(炎黃子孫)'이라고 자랑하며 직계 조상으로 섬겨온 황제(黃帝)와 염제(炎帝)에서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복희는 풍(風)씨, 염제는 강(姜)씨, 황제는 희(姬)씨로 소개됐다.
이뿐만 아니라 그동안 중화문명을 위협한 세력이라며 배척했던 배달국의 치우(蚩憂)천왕을 염제와 동급의 중국 조상으로 배치했다.
치우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 때 한국 붉은 악마 응원단의 상징의 하나로 사용됐다. –중략-
주몽이라는 드라마가 유행하였을때 이를 신화다 전설이다 라고 폄하했는데 이 이야기는 겨우 기원전 173년전의 일입니다. 한나라 유방이 천하통일을한후 60년 경제가 오,초 7국의 난을 평정한 지 13년지난 무제시대(이때 역사학자 사마천이 탄생하여 활동) 전국을 28개군을 설치하였고 이때 한나라 에 의해 고조선이 멸망 (기원전 108년)이시기는 로마제국은 3차포에니전쟁이 끝나고 마리우스가 호민관에 취임한시기입니다
고조선 멸망이후 조선에 한 사군(낙랑 임둔 현토 진번)을 설치하여본격적인 한나라 지배체재로 들어가게되었고
이에 고조선 유민들의 조직적항거와 첫민족국가인 고구려가 태동하는(기원전37년)이야기를 그린 주몽의 이야기를 단순 설화정도로 보고있으니 안타까울뿐입니다.
이 시대의 로마제국은 마크 안토니가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시기입니다. 먼 이야기가 아닌 가까운 우리의 역사입니다. 서양사는 믿지만 동시대 있어든 우리의 상고사를 믿지않는 이유를 이해할수없습니다
이런 역사적사실을 전설이고 신화라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의 기록의 문화와 일제 강점하에 비뚤어진 역사를 바로 잡지 못한 이유 때문입니다. 나라가 그기까지 힘이 못미쳐이런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한 나라의 국회의원 나리들이 이제와서 수치심을 느끼다니.... 예전부터 착착 진행되어 왔던 동북공정 이제는 어찌할꼬 ?
“후손인 우리가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것 아니냐.” 한나라당 노철래 의원은 동북공정의 현장과 마주한 기분을 이렇게 밝혔다. 노 의원뿐 아니라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은 처음이라고 29명의 국회의원들은 입을 모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온 반응은 “듣던 것보다 훨씬 치밀하다.”는 것이었다.
▲ 지난 5일 오전 항일 역사탐방 차 중국을 방문한 한나라당 이경재(왼쪽)·이해봉(가운데)의원,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한반도의 영토 경계를 투먼장(圖們江·두만강의 중국 명칭)으로 표시한 장백폭포 내 간이 지도판을 가리키고 있다.
●“이 정도로 심각한 줄 몰랐다”
지난 4일 이른 오전, 의원들은 백두산 장백폭포의 멋진 경관에 한껏 들떴다가 일순 표정이 어두워졌다. 입구에 놓여진 간이지도 표지판 때문이었다. 백두산 봉우리들을 그려놓고 양 옆에 압록강과 투먼(圖們)강으로 영토 경계를 표시해 놓았다. 국사학을 전공한 한나라당 안형환 의원이 “간도 분쟁을 피하기 위해 우리 영토를 의도적으로 축소시킨 흔적”이라고 설명했다. 안 의원은 “1712년 조선과 청나라가 세운 백두산 정계비에는 우리 영토의 경계로 표시된 ‘토문강(土門江)’을 우리나라는 송화강의 발원지로 보고 있다.”면서 “그런데 중국은 이를 의도적으로 ‘투먼강’으로 해석해 간도 일대가 조선령이 된다는 역사적 해석을 미리 막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김동성 의원은 “그동안 동북공정이 진행된다는 것은 익히 들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한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이진복 의원은 “중국의 이토록 체계적인 접근에 더욱 경악했다.”면서 “이러한 상황이 더 오래가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고 후손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노 의원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남북이 분단되는 과정을 겪고 정치적으로 격동기를 경험하면서 동북 3성에 대한 관심을 가질 기회가 별로 없었다. 너무 소홀했다.”면서 “상황이 여기까지 오게 한 데 대해 후손으로서 부끄러움을 갖고 깊이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中, 독립운동사 부각 ‘부담’
비단 고대 고구려나 발해의 역사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중국은 큰 틀에서 우리의 민족성과 역사에 대한 흔적이 부각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다. 5일 청산리대첩 승전 90주년을 맞아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이린(海林)시 싼스(山市)진에 있는 김좌진 장군 순국지에 개관한 ‘백야광장’도 정작 중국 땅에서는 제 이름을 드러내지 못한다. 국가보훈처에서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에 예산을 지원해 조성했지만, 정작 중국 당국은 성역화 사업에 대해 거부감을 보였다. 그래서 ‘한·중 우의광장’이라고 이름을 짓고 마을에 광장을 조성해 주민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역시 하이린시에 있는 김좌진장군 기념관(2001년 개관)도 중국에서는 ‘한·중우의공원’일 뿐이다.
이러한 기념 사업도 대부분 개인이 추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김좌진장군 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는 한나라당 김을동 의원은 “중국에서 대한민국의 국가유공자를 기리는 사업에 대해 시각 자체가 너무 날카로워 이를 이겨내는 데 한계점이 많았다.”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은 그나마 뒷전이었다.”고 토로했다. 김 의원은 중국땅에서 기념사업들을 진행하기 위해 살던 집을 팔면서 사비를 털었다. 아들인 배우 송일국씨가 힘을 보태는 정도다. 이경재 의원은 “역사를 기리는 일을 이렇게 개인의 힘으로 힘겹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면서 “그러나 당분간은 기념사업회나 역사재단 등에 지원을 더 해 중국에 보다 유연하게 다가가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갈등 피하려 ‘대접’ 스스로 포기
6일 오전 헤이룽장성 하얼빈역에서 의원들은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가 당시 이토 히로부미 통감을 저격한 거사 현장을 직접 보기 위해 5시간 남짓 기차를 타고 도착한 현장이었다. 그런데 의원들의 등장에 중국 공안들은 당황하며 출입을 막았다. 의원들의 몸을 막으며 강하게 제지했다. 다시 역 밖으로 나가서 표를 사서 들어오라는 등 갖가지 핑계를 댔다. 한참의 승강이 끝에 결국 4~5명씩 짝을 지어 조용히 현장을 보고 오기로 하고 나서야 의원들은 발을 뗄 수 있었다.
이번 일정이 국회의원 신분으로 방문한 게 아니라 철저히 민간인, 일반 해외 여행객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지난 3월에도 김을동 의원이 주최해 15명의 의원이 하얼빈역을 방문했지만 그때에는 아예 역 안으로도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겨우 눈으로 보게 된 거사 현장이라고 해봤자 플랫폼 바닥에 안 의사가 서 있던 곳에 삼각형,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을 당한 곳에 사각형으로 각각 표시를 해둔 것이 전부였다. 어디에도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라는 글자는 없었다.국가보훈처 관계자는 “당초 표지판을 세울 계획이었으나 일본의 견제로 중국에서 부정적 의사를 밝혀 도형으로 표시만 할 수 있게 승인해 준 것”이라면서 “중국에서 우리의 역사현장을 보존하는 것에 계속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정치인이나 정부에서 외교적 채널을 통해 양국의 양해를 얻는 방법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한·중·일 3국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동북 3성이 현재는 외교적으로 첨예한 지역이 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역사인식 바로 세워야”
특히 일본이 얽혀 있는 일제시대를 비롯한 근대사의 현장은 더욱 민감한 부분이다. 그런 만큼 더욱 전략적이고 체계적인 대응책이 필요하다는 게 의원들의 지적이다. 이진복 의원은 앞서 개인 일정으로 중국 연변(延邊) 용정(龍井)에 있는 시인 윤동주 선생의 생가와 그가 다녔던 용정중학교 등을 둘러보고 왔다. 이 의원은 “정부가 관리를 할 수 없는 상황인지, 하지 않는 건지 너무 심각하게 방치돼 있었다.”고 비판했다. 김광림 의원도 “그 당시 재산과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위인들을 우리 스스로가 너무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바탕으로 역사인식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은 '일본이 중국의 만주철도부설권과 맞바꾼 간도협약'은 마치 '중국이 자국의 이익을 빌미로 일본에게 장물인 간도를 불법적으로 취득한 행위'이니 역사왜곡 동국공정 그만두고 불법점유하고 있는 간도를 즉시 한국으로 반환하라.... 日本製品 不買運動 / 해방 후 1948년에 주장하였으나 미국에 의해 무산된 대마도의 한국령을 선포하는 계기로 삼아야.... / 日독도영유권 주장은 "제2의 침략과 탈취행위" / 独島は日本の領土? 日本は大韓民国の領土? .^...